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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교도소 늘리면 '가난'이 해결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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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교도소 늘리면 '가난'이 해결되나?"

[의제27 '시선'] '가난'을 대하는 두 가지 방법

칼럼 주제로 볼 때, 가난은 이제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다. 수치로 보는 빈곤율로는 느낌이 잘 전달되지도 않는다. 상대적 빈곤율 15.2%, 청년 실업률 10%, 사실상 실업자 400만 명, 노인 빈곤율 45.1%, OECD 최고 수준. 최근 며칠 새 언론에서 크고 작은 제목으로 볼 수 있었던 숫자들이다.

그러나 가난은 수많은 사회문제들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최근 떠들썩했던 사건의 배경에도 가난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언론에서 스케치한 대로 엮어본다면, 출생 직후 버려진 출발, 성장 이후 가본 곳이라고 교도소밖에 없는 단절된 생활, 부수다만 집이 널려 있는 쇠락한 동네. 이런 것들이 그 범죄의 배경에 놓여 있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면 곧바로 흉악범을 옹호하자는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가난하다고 모두 범죄에 빠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가난한 지역이라고 특별히 범죄율이 높다고 할 수도 없다. 더구나 우리는 지난 40년간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경험했고, 또 그래서 누대의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자부심도 있다. 어려운 환경이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지 좌절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식의 교육도 받았다. 대개 고도성장의 주역이었던 노년세대들은 가난 앞에 무너진다는 것을 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장 시절에는 노숙인들에게 건설현장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자립을 촉구한 바 있다. 지난해 재래시장에 가서는 어릴 적 노점상이었던 자신의 처지를 거울삼아 성공할 것을 촉구했다. 가난은 대체로 개인의 책임이며, 또한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것이라는 취지이다. 마찬가지로 가족해체나 잦은 사고, 심지어 범죄 등 가난과 결부된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개인과 가족의 책임을 묻는 경향이 강하다. 가난에 대한 보수적인 생각의 전형이다.

그러나 지금의 가난은 고도성장 세대가 생각하는 현상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일만 하면 가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빈곤층 가정 중에서 60%가 일할 사람이 있는 경우이다. 낮은 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는 현대 빈곤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높은 청년실업률은 좀 산다는 나라에서는 모두 끙끙 앓는 문제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최근의 가난은 그 기준 자체가 변해버렸다. 과거에는 밥을 굶는가 아닌가가 가난의 척도였다면, 최근에는 말하자면 최신형 휴대폰이 있는가 없는가가 기준이 된 것이다. 현란한 광고, 가득찬 정보의 시대에 나의 조그만 부족은 금새 확인할 수 있는, 뼈저린 고통이다. 결국 가난은 급속한 산업구조 변화와 고도소비 시대가 초래하는 것이기에, 개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제대로 적응할 수단을 제공하지 못한 사회의 책임도 크다. 가난에 대한 진보적인 접근법이다.

그러나 가난에 대한 보수-진보의 생각이 어떠하던 간에, 가난이 초래하는 사회문제는 시급히 대처해야 될 사회적 현안이다. 학업포기, 만성질환, 가족해체, 일탈과 범죄 등 일반적으로 가난과 연계되어 있다고 보는 문제들은 가난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당장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될 과제이다. 막연히 불쌍하기 때문이든, 혹은 그대로 두어서는 사회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든, 혹은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든 어떻든 이 문제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

역시 두 방향의 접근이 있다. 결과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범죄자를 아예 못 나가게 묶어 둔다든지 혹은 더 나아가 사형을 부활시킨다든지 하는 식이다. 청송교도소를 늘리자는 생각도 그런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할 말은 있지만 여기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 청송교도소 수감자들을 돌아보는 이귀남 법무부장관 ⓒ법무부

문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원인에 집중하는 목소리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특히 가난에 대한 '인식피로'가 느껴진다. OECD 1위다 어쩐다 하는 숫자의 홍수 속에서, 이제는 사뭇 둔감해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저 지금의 경제난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또 고도성장의 신화가 각인된 사람들로서는 가난의 진짜 심각성을 아예 이해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습성 때문일 수도 있다.

가난은 무서운 것이다. 특히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하면 더욱 무서운 일이 된다. 가난의 반대말은 희망인데, 그 희망이 갈수록 엷어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해답은 정해져 있다. '더 튼튼한 사회안전망, 더 많은 일할 기회, 적절한 노동의 대가'가 그것이다. 다만 가난을 얼마나 심각히 보느냐에 따라 그냥 생색내기에 그칠지, 아니면 전력을 다해 해결에 나설지가 달라질 뿐이다. 가난의 끝에서 겪게 되는 많은 일들을 막기 위해서는 가난을 끝내려는 각오로 나설 도리밖에 없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별의별 일들을 더 겪어보면, 아! 그게 전부 가난 때문이었구나 하고 후회하게 될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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