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먼저 나타나는 사람은 땅 속에 머리를 파묻고 거꾸로 나타나는데 이 사람은 마이너스 소득을 가진 파산한 사업가다. 그 다음에 파트타임으로 몇 시간 일하는 주부, 신문 배달 소년 등이 출현한다. 노인, 실업자, 장사가 안 되는 가게 주인, 아무도 재주를 알아주지 않는 천재 화가 등 키가 1미터가 안 되는 이들이다. 그 다음에 1미터가 조금 넘는 청소부, 지하철 집표원 등 저임금 노동자들이 출현하는데 시간이 흘러도 키는 좀체 커지지 않는다.
평균 신장을 가진, 즉 평균 소득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48분이 지나서다. 평균 소득이 지나가고 나면 키는 급속도로 커진다. 마지막 6분을 남겨 두고, 소득 수준이 최고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2미터 가까운 키를 가진 교장, 대졸 사원 등이다. 그 후 키는 빠르게 상승하며, 그리 성공하지 못한 변호사, 대령, 국영기업의 기술자들의 키가 5미터 정도다. 마지막 1분을 남기고 8미터의 대학 교수가 등장하며, 대기업의 중역은 9미터, 고등법원 판사는 12미터다. 수입이 좋은 회계사, 의사, 변호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의 키는 거의 20미터다.
마지막 몇십 초는 정말로 굉장하 거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주로 대기업 중역들이고 약간은 왕족이다. 행렬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은 대기업 총수다. 아무도 그의 키를 모른다.
▲ <불평등의 경제학>(이정우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프레시안 |
불평등. 두 번의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한국 경제의 더욱더 큰 화두가 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교수가 최근 <불평등의 경제학>(후마니타스 펴냄)을 냈다.
'성장 VS 분배' 논쟁에서 '무상 급식' 논쟁까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상 급식이 주요한 정치 쟁점이 됐다. "부잣집 아이들에게 공짜 점심을 줄만큼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다"라는 한나라당의 주장과 "가난한 집 아이들도 부잣집 아이들과 똑같은 밥을 먹을 수 있게 하자"라는 야당과 시민단체들의 주장이 맞붙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복지를 세금을 내는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시혜'로 인식하는 '잔여적 복지'냐, 세금을 내는 납세자들과 복지 정책의 수혜자를 일치시키자는 '보편적 복지'냐, 어느 쪽으로 갈 것이냐를 둘러싼 논쟁이다. 현재의 '잔여적 복지'를 '보편적 복지'로 전환하자는 것은 사회경제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간단치 않은 문제다.
이번 무상 급식을 보면서 7년 전 노무현 정부 초기 '성장 대 분배' 논쟁이 떠올랐다. 당시와 비교하면 어쨌든 '복지'가 전제에 깔린 것이라는 점에서 무상 급식 논쟁이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나 논쟁 구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잔여적 복지'는 복지 혜택을 최소화하자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성장주의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정우 교수는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진행됐던 당시 논쟁의 한 가운데 섰고, <조선일보> 등 보수 세력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됐다. 이 교수는 결국 1년도 못돼 2003년 12월 정책실장에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05년 7월 사임했다. 이 교수가 물러나면서 노무현 정부의 경제 정책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 '성장주의'로 돌아섰다.
이 책은 이 교수가 지난 1991년 출판했던 <소득분배론>의 개정증보판격이다. 경제적 불평등을 낳는 여러 요인들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분배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실증적 검증을 담은 '교과서'에 가까운 책이다. 이 교수가 5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결과적으로 검증하고 싶은 것은 한국 사회를 사로 잡고 있는 '성장 만능주의'다.
"역대 정부가 성장률 극대화에 매진했고 조금만 성장률이 떨어져도 경제 장관을 문책, 경질하면서 성장률 제고를 독려해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비교적 높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장률에 대한 감각 역시 기준이 매우 높은 편이다. 조금만 성장률이 낮아져도 대통령이 참지 못하고 국민도 참지 못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런 국민적 조급성의 토대 위에서 '경제 위기', '국정 파탄' 같은 극단적 표현이 우리에게는 조금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외국의 관찰자들은 걸핏하면 찾아오는 한국 경제의 '위기론'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7퍼센트 성장'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탄생 역시 '성장 만능주의'가 가져온 결과다.
"정상 국가로 가자. 시간이 얼마 없다"
이 교수는 한국 경제의 불평등 문제가 이런 성장 만능주의의 소산으로 봤다. 성장 만능주의에 빠져 분배와 복지를 무시해왔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 정부 예산 중 경제 예산과 복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들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복지 예산이 경제 예산보다 훨씬 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보면 복지 예산이 55퍼센트 정도, 경제 예산이 10퍼센트 정도다. 이에 반해 한국은 오랫동안 경제 예산이 복지 예산을 압도해왔다. 이것이 뒤집어진 게 노무현 정부 때다. 이 교수는 "노무현 정부 초기에 복지 예산이 20퍼센트였는데, 임기말에는 28퍼센트로 높였다"며 "우리나라 예산 구조가 국제적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기형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30퍼센트가 넘는 높은 자영업자 비중도 성장 만능주의의 결과로 꼽았다. 그는 다른 나라의 2~3배에 달하는 자영업자 비율에 대해 "복지 예산이 부족하니 교육, 보건, 보육, 복지 등에 일자리가 없고, 이런 일자리에서 일해야 할 사람들이 각자 살 길을 찾아 몰려간 곳이 자영업이다. 그리하여 식당, 빵집, 술집, 다방, 미장원, 이발소, 택시, 게임룸 등등 무수히 많은 자영업자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가 돼 버렸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소위 공공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이 전체 취업자 중 5퍼센트 밖에 안되는 데 스웨덴은 30퍼센트나 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출산 문제를 꼽았다. 그는 "저출산은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나라에서 한창 일할 연령대 인구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경제 성장에 치명적 장애 요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야말로 40년 성장 만능주의를 반성하고 정상적인 나라를 만들어야 할 때"라면서 "그동안 우리 머리를 지배해 온 '선성장 후분배'의 철학을 폐기하고 분배와 성장이 동행한다는 인식, 분배를 통한 성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세계 보편적 인식을 가질 때"라고 주장했다. "양극화가 날로 심해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게 이 교수가 우려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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