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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19] 슬픔의 카타르시스, 연극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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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19] 슬픔의 카타르시스, 연극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

[공연리뷰&프리뷰] 유랑하는 극단, 유랑하는 인간

한 남자가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진다. 이를 진단하던 의사는 그의 뱃속에서 긴 머리카락을 꺼낸다. 이 사건은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아홉 시 뉴스에 나온 이야기냐고? 아니, '사건'보다 더욱 생생한 상상의 이야기다.

▲ ⓒ프레시안

쌍둥이 소실 증후군(vanishing twin syndrome). '쌍둥이 소실'이란 쌍생아 중 하나가 모체 속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뜻한다. 과학적으로 사라진 아기는 모체에 재흡수 되거나 아무런 징후와 증상 없이 유산된다고 알려졌다. 이는 경련과 하혈을 동반하는 일반적 유산과는 다르다. 임산부가 정서적으로 불안해질 수 있지만 특별한 부작용은 일으키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는 한쪽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쌍생아의 원초적 공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복통을 호소하던 남자주인공 다구치의 뱃속에서 발견된 유키코의 머리카락은 지극히 불가능한 것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사라져야했던, 태어나지 못한 이란성쌍둥이 유키코의 머리카락이 다구치의 뱃속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제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몽환의 세

▲ ⓒ프레시안
머리카락 제거 수술을 위해 전신마취를 한 다구치는 꿈속에서 여동생 유키코를 만난다. 다구치는 그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작품은 죽은 이란성 쌍생아의 세계를 조망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곳은 민감하며 깨지기 쉬운 '유리세계'로, 유리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우나 차갑고 투명하다. 그 몽환의 세계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며 원초적 감각에 닿아있다. 연극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는 납득할만한 서사를 일렬로 늘어놓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공간처럼 아이러니한 상황과 장면, 대사를 군데군데 흩뿌려 놓는다. 이 혼란스러운 연극에는 잔인함과 유머, 공포와 아름다움이 격자무늬처럼 겹쳐있다. 완벽한 이해에서 비롯된 공감보다는 인정(認定, 人情)을 요구한다.

다구치는 유키코를 유리세계로부터 탈출시키려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얼어붙은 유리를 녹일 수 있는 뜨거운 피가 필요하다. 다구치는 자신의 손가락을 주려다가 유키코의 약혼자 프랑케에게 살해 된다. 눈보라를 헤치며 유키코를 찾아 나선 다구치, 잘려진 손가락, 극을 가로지르는 집시와도 같은 걸식노인들, 요상한 분장의 프랑케 등, 전부가 현실과 멀어 보이지만 모든 것들은 현실보다 반짝인다. 이 잔인함은 문명의 발달 속에서 교육받아온 인류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인간, 그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며 두드릴 뿐이다. 그 두드림은 호소보다 날카롭다.

- 불안정한 존재들이 전하는 슬픔의 메아리

▲ ⓒ프레시안
"유리 자궁은 무엇을 낳아. 투명한 육체, 투명한 내장, 투명한 두뇌를 가진 아이여. 최후의 마지막 날에 깨질 육체를 두려워하는 아이…."

연극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에는 위트가 가득하다. 과장된 표정과 몸짓, 부조화된 의상은 현실을 비틀고 불모의 땅과 새로운 캐릭터들을 창조했다. 시공간 또한 불문명하다. 소녀 유키코도 그와 같이 불안정한 존재다. 도식화된 이 세계와 조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곳(현실)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단지 '나와 다른 존재'로의 매력만을 느낄 뿐이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난 유키코는 떠돌아다니다 끝내 사라지고 만다. 마취에서 깨어난 다구치도 그녀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 존재의 슬픔은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아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를 전한다. 그리고 마지막, 잔인하고 기이한 장면들에 가려진 인간 본연의 슬픔이 폭발하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5만 개의 유리구슬이 떨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경이로움과 탄성 동시에 있는 힘껏 무너지는 한 세계에 대한 오열을 대신한다.

이 작품은 환상(유리세계)과 현실, 생명과 죽음을 넘나들며 생명성과 불모성에 대해 묻는다. 그 표현방법으로 진부한 캐릭터나 식상한 눈물 대신 '마음껏 놀기'를 택했다. 불시착의 외로움을 기묘한 상황과 유머로 대신하며 앙그라(언더그라운드) 연극의 진가를 보여줬다. 신주쿠양산박은 생생한 에너지로 정면 승부했으며 관객은 그들의 용기와 생명력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 '신주쿠양산박'은?


신주쿠양산박은 1987년, 재일교포 김수진을 대표로 일본 동경에서 결성됐다. 신주쿠양산박이란 극단 이름은 중국 소설 '수호전'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혼탁한 세상에 대항하는 방식으로의 연극을 택한 연극인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다. 신주쿠양산박은 일본 연극계가 점차 잃어가고 있는 '이야기(로망스)의 복권'을 추구하고 있으며, 또한 일본 연극의 중요한 맥인 '앙그라 연극'을 계승하여 일본 국내외에서 적극적인 공연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텐트와 극장 이라는 독특한 무대를 주력으로 하는 신주쿠양산박의 연극적 특징은, 텐트와 실내극장 모두에서 공간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며 주변 공간까지 적극적으로 연극적 공간에 참여시킴으로 관객을 연극이라는 판타지 세계로 초대하는데 있다. 신주쿠양산박은 극단 결성 이후, 역동적 무대와 다양한 연극적 실험을 통해 일본 연극계에서도 창조적 활력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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