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씨는 보증금 500만 원의 월세 15만 원짜리 일명 '쪽방'에 산다. 주방은 물론이고 공동 화장실마저 없어 집 바로 옆에 있는 지하철 화장실을 이용하곤 한다. 혼자 사는 박 씨의 한 달 가계부를 들여다보니, 식비가 60만 원, 난방비 등이 1만1750원, 주거비가 16만5000원, 교통비가 1만1000원, 의복비가 24만7000원 들었다. 나름 13만 원 저축도 하고 빌린 돈을 갚는 데 2만 원도 썼다.
▲지하철 청소 일을 하는 박연자(61) 씨의 지난해 12월 가계부는 마이너스 49만 원이다. ⓒ프레시안(여정민) |
박 씨와 같은 저임금 노동자는 일자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매달 34만 원의 적자를 보는 것으로 확인됐다. 민주노총이 저임금 노동자의 한 달 수입과 지출의 세부 항목을 구체적으로 조사한 결과다. 민주노총은 지역할당으로 선정한 14명의 저임금 노동자에게 지난해 12월과 1월 두 달 동안 가계부를 작성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번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저임금 노동자는 일자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적자를 메우기 위해 매달 평균 20만 원을 빌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빌린 돈도 갚고 이자도 내야 하니, 일을 하면서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있는 이들의 실태가 처음으로 확인된 셈이다.
한 달에 129만 원 벌어 163만 원 쓴다…매달 19만 원씩 '빚' 생겨
민주노총이 11일 내놓은 '저임금 노동자 가계부 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은 한 달에 129만 원의 근로소득을 얻고 있었다. 이 외에 은행이나 친척, 이웃 등에게 빌리는 돈은 월 평균 19만 원으로, 차입까지 포함한 평균 수입은 148만 원이었다.
반면 지출은 월 평균 163만 원이었다. 순수한 수입과 지출만 놓고 보면 매달 34만 원, 빌린 돈을 포함해도 매달 14만 원의 적자를 보는 셈이다.
이런 적자 규모는 통계청의 조사 결과와도 비슷하다. 통계청이 내놓은 2009년 4분기 및 연간 가계동향 자료를 보면 1분위 가구의 월평균 수입은 101만 원이었고 평균 33만5000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정호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통계청 조사는 일을 쉬고 있거나 기초생활보호대상자도 포함된 것인 반면, 민주노총의 조사는 14명 모두 직장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투 잡(two job)도 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점"이라며 "그럼에도 두 조사 결과가 유사한 것은 소득 하위 1분위 가구의 경우 일을 하더라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체 지출의 12.5% 부채 상환에 사용…통신비, '효도비' 비중도 높아
지출의 세부 항목을 보더라도 일반 가구와 일명 '근로빈민(워킹푸어)' 가구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조사 대상자들의 경우, 가계 지출의 67.4%라는 절대 다수액을 의식주와 의료비에 쓰고 있었다.
한국은행 권장 가계부의 구성항목대로 작성한 지출 항목 16개 가운데 압도적인 1위는 식비였다. 전체 지출의 18%가 식비로 들어가고 있었고, 보건위생, 즉 의료비가 10.5%로 3위였다. 4위는 난방비 등 '광열수도' 항목(8.9%)였고, 옷이나 신발 등 피복비도 7%나 됐다.
빚이 많다보니 부채상환이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컸다. 전체 지출의 12.5%가 부채 상환에 들어가고 있어 지출 항목 가운데 두 번째로 많았다.
▲ 지출의 세부 항목을 보더라도 일반 가구와 일명 '근로빈민(워킹푸어)' 가구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조사 대상자들의 경우, 가계 지출의 67.4%라는 절대 다수액을 의식주와 의료비에 쓰고 있었다.ⓒ프레시안(여정민) |
통신비도 6.6%로 전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집전화와 휴대폰, 인터넷 등 어느 가구나 다 쓰는 비용이지만,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 등 대책이 없고 전체 소득이 워낙 적다 보니 비중이 높은 것이다. 일반 가구의 통신비 비중은 4.7% 수준이다.
특이한 점은 일명 '효도비'로 분류된 지출이다. 이는 부모나 함께 살지 않는 손자 등에게 주는 용돈으로 전체 지출의 5.8%나 됐다. 이정호 국장은 "조사 대상자 가운데 본인이 56세의 저임금 노동자임에도 80대 노모의 생활비를 드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주거비 비중, 일반 가구는 10.5% vs. 저임금 가구는 27.7%
이런 지출 구성을 통계청의 가계동향 조사에 이용되는 12개 항목으로 다시 분류해 비교해 보면, 일반 가구와 저임금 가구의 생활의 차이가 도드라져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저임금 노동자는 전체 지출의 27.7%를 주거비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일반 가구는 10.5% 수준이어서 3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대부분의 저임금 노동자가 빚이 포함된 전세나 월세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 씨의 경우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의 '쪽방'에 살다가 집 주인이 이를 전세 1000만 원으로 올려달라고 해, 지난해 9월 이사를 해야만 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박 씨는 "화장실조차 딸리지 않은 집인데도 2년 사이 집 값이 너무 올랐다"고 하소연했다.
▲ ⓒ프레시안 |
두 집단의 지출 비용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지출 항목은 문화생활과 관련된 교양 비용과 교통비다. 저임금 노동자가 문화 생활에 사용하는 지출은 1.0%에 불과해, 일반가구 3.7%에 비해 4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교통비도 일반 가구에 비해 확연하게 적었다. 일반 가구는 교통비로 평균 11%를 사용하고 있는 데 반해, 이들 저임금 노동자는 4.5%였다.
이정호 국장은 "구체적으로 면접을 해 보니 신문을 보는 것 외에 이들에게 딱히 문화생활이라는 것이 없었고, 종교생활 외에는 특별한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며 "이들을 방치할 경우 '사회적 단절'에 의한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저임금 노동자가 고령이다 보니, 의료비 비중도 매우 높다. 일반 가구의 의료비는 전체 지출의 5.1%수준이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11.9%나 됐다. 대구에서 청소용역 일을 하는 한 노동자(63)는 중환자 남편과 살고 있어 12월과 1월 두 달 동안 의료비로만 75만4300원을 썼다. 이 노동자의 두 달 수입은 312만 원이었다.
"중소기업 핑계는 그만, 최저임금 현실화가 절실…5152원으로 인상하자"
이번 조사를 진행한 민주노총은 "이런 현실이 최저임금의 결정 기준에도 반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29세 미만의 미혼단신 노동자의 생계비'를 최저임금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중고령 저임금 노동자의 연령적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번 조사 결과, 법적으로는 '단신' 가구가 아니지만 병들어 노동력을 상실한 남편과 청년실업 자녀를 둔 2~3인 가구의 가계수지는 더욱 열악했다"며 "최저임금생계비기준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조사를 진행한 민주노총은 "이런 현실이 최저임금의 결정 기준에도 반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레시안(여정민) |
김영훈 위원장은 "재계는 중소기업의 핑계를 대며 지난해 최저임금 삭감을 주장했지만, 중소기업 위기의 진짜 이유는 최저임금이 아니라 재벌 원청회사의 '불법 하도급 관행'"이라며 "최저임금 현실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민주노총이 내놓은 올해 최저임금 요구안은 시급 5152원으로 현행 4110원에 비해 25.4% 인상안이다. 민주노총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실태를 분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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