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 속에서 황유미는 그들과 달리 말을 아꼈다. 그는 아버지와 여동생,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함께 일하는 회사 동료들도 걱정했다. 몸이 빨리 회복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 자신을 위해 쏟아낸 말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거대한 기업과 싸우려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그런 류의 싸움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강원도 속초에서 채 상고를 졸업하기도 전에, 반도체공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던 그는 외부와의 접촉이 통제된 기숙사에서 살았다. ⓒ윤보중 |
강원도 속초에서 채 상고를 졸업하기도 전에, 반도체공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던 그는 외부와의 접촉이 통제된 기숙사에서 살았다. 비번일 때에 수원시내로 나가 찻집이나 호프집을 전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에게는 극장을 가는 일조차도 많은 것을 허락한 결과였다. 그는 늘 과중한 일에 힘이 들었고, 보다 능숙해지기 위해 경험해야 했던 위험한 일들로 인해 신경이 예민해 있었다. 장갑을 끼워도 액체에 담갔다 빼기를 반복하면 어느덧 손이 빨갛게 붓던 그는, 일을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가도 같은 방 룸메이트와 근무시간이 달라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다.
공장에서 가장 절친한 사람은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같은 공정의 동료였다. 대부분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 위험하고 예민한 일들의 숙련공이 되는 과정에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잦았다. 이런 상황에서 황유미가 경험했던 것들은 '오히려 약품보다는 언니들의 지시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와 과로가 병의 원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들게 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이숙영은 같은 라인, 같은 공정에서 일하던 황유미의 부사수였다. 이숙영은 임신 중에 황유미와 함께 해맑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숙영 또한 광주에서 상고를 나왔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기업 사업장에 곧바로 취직했다. 그리고 사망 직전까지 대기업과 자신을 위해 일했다. 이숙영은 황유미가 백혈병으로 회사를 나가지 못하고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 그 자신도 백혈병으로 급격이 몸이 악화돼 수개월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숙영의 죽음은 황유미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황유미는 자신의 전임자가 유산 경험이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전임자도 몸이 안 좋아서 일을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다들 나이가 어리고,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거나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늘 있는 일이었고 황유미도 알고 있었다. 위험이란 언제나 개인적인 문제였고, 자신의 문제로 다가오기 전까지는 위험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 황유미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신앙이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일류기업의 톱니바퀴 밑에는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좀 더 값싼 전자제품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지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황유미의 백혈병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오히려 나는 황유미의 죽음을 접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질병들에는 다양한 환경이 주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황유미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로 하여금 보다 분명한 문제의식을 갖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 의혹이 밝혀지기에 앞서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황유미의 죽음, 이숙영의 죽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 없는 죽음의 연관 관계. 그것들의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과 함께 여전히 그러한 개연성에 의해 백혈병이 발병했거나, 다른 질병으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죽음은 결코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하거나 유의미하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기업의 부조리를 감시해야 할 국가와 그 기관들의 표현방식, 그들의 죽음을 단순한 숫자로 표시하는 방식에 대해 강력히 항의해야 한다.
나는 어느 날인가 황유미의 부친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글쎄. 병원에 데려갔다가 속초로 돌아가는데 차안에서 유미가 숨을 잘 못 쉬는 거야. 그러다가 애 엄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서 차를 세우고 돌아봤더니 유미가 숨을 거두었더군. 그렇게 차안에서 죽은 거야."
택시운전기사였던 황유미의 아버지는 그 죽음을 그렇게 회상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발개졌던 그 순간을 이제는 좀 더 차분하게, 그러나 희미하게 떠올릴 뿐이다. 지금도 인터뷰 중에 머리가 짧아서 창피하다는 황유미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다. 세상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다. 단지 약간의 행복을 위해 기계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다가 버려지고, 외롭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의 편리함과 안일함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인정받지 못한 채 사라져 간다.
이 순간 나는 그 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유미 씨. 많이 아팠죠. 아직도 우린 많이 부족하군요. 하지만 언제나 유미 씨가 우릴 향해 웃어줄 것 같아 힘이 나는군요. 아버님도 어머님도 모두들 유미 씨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늘 두 분을 지켜봐주세요. 우리도 언제나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故 황유미 씨는 1985년생으로, 속초상고 3학년 재학 중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하였습니다. 그러나 2년만인 2005년 6월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받고, 2007년 3월 6일 운명하셨습니다. 이 글을 써 주신 윤보중 님은 <민중의소리> 기자로 재직 중 고 황유미 씨 아버님의 전화를 받고 유미 씨가 죽기 한 달 전에 그녀를 만나 본 기자입니다. 유미 씨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반올림'은 고 황유미 씨의 추모기일을 즈음하여 오는 3월 2일부터 3월 5일까지를 '반도체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주간'으로 정하고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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