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터진 미국발 금융위기의 후폭풍은 아직 일부 산업에서 이어지고 있다. 조선업이 대표적이다. 수년 간 부동의 수출 효자산업으로 자리매김한 조선업은 그간 '기술력이 낮다'며 한 수 아래로 여기던 중국의 거센 도전에 치이는 동시에 전세계적 불황 여파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뚝 떨어진 조선업 신규수주가 일부 금융지표에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외환시장이 대표적이다. 조선업체의 선물환매도 규모가 줄어들면 외환시장은 보다 안정된 흐름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은행은 25일 <조사통계월보> 2월호에 수록한 '조선업체 환헤지가 외환 부문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견 이해하기 어려운 조선업과 외환시장의 역학관계를 재조명했다.
조선업이 외환시장을 흔드는 이유
조선업은 지난 2003년부터 약 5년 간 세계 조선경기 호황에 따라 큰 폭의 성장세를 이어갔다. 미국 월가의 붕괴로 위기감이 고조되던 2008년 중순 당시도 조선업계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에 이미 3~4년분 일감을 확보했다는 이유로 여유를 부렸던 배경이다.
조선업이 호황을 맞으면 당연히 달러가 국내로 대거 유입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보면 실상은 반대다. 오히려 달러 수요가 급증한다. 이유는 조선업이 가진 특성 때문이다.
조선업은 고가의 상품(선박)을 장기간에 걸쳐 생산하는 과정을 가진다. 이 때문에 주문업자는 보통 5년 정도로 대금을 나눠 지불한다. 통상 선박수출대금이 조선업체로 유입되는 경로는 대여섯 차례로 나뉜다. 계약금이 수주계약 직후 또는 수개월 내에 결제액의 10~20% 정도로 먼저 입금된다. 그리고 중도금이 수년 동안 4~5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입금된다.
이 때문에 국내 조선업체는 당연히 환위험에 노출된다. 장기간에 걸쳐 환율이 어떻게 변동할지를 예측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업체는 환위험을 헤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선물환 계약이 등장하는 이유다.
한은에 따르면 2003년 국내 조선업체 수주액 중 위험을 헤지하지 않은 금액은 약 194억3000만 달러였으며, 이 기간 원-달러 환율이 5.0%가량 절상(원화가치 하락)됨에 따라 국내 조선업체는 약 1조1000억 원 정도의 손실을 입었다.
국내 조선업체들의 환헤지 수요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때도 이 즈음부터다. 한은은 "상당수 조선업체가 2004년 이후 선박수주 계약체결 당일 또는 2주일 이내에 수주물량 전액을 헤지했고, 나머지 기업들도 수주물량 중 원자재 수입분을 제외한 순위험노출(익스포저)분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업체들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환위험 헤지 전략이 바로 선물환(outright forward) 거래다. 당시는 환율이 계속 내려갈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이 때문에 대부분 조선업체들은 선물환 매도로 환율 하락 위험을 방어하고자 했다.
선물환 매도란 앞으로 받을 외화, 즉 주문업자에게 받을 달러화를 일정한 환율로 계약 당시 고정시키기로 하고, 조선업체가 은행에 지금 당장 계약 상당분의 달러를 파는 기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조선업체가 선박 계약을 통해 앞으로 3년에 걸쳐 100만 달러를 받기로 했고 이 금액 중 50만 달러를 선물환 매도키로 결정했고, 6개월 후 10만 달러, 2년 후 20만 달러, 3년 후 20만 달러를 받기로 했다고 가정하자(수주계약 당시 환율은 1달러 당 1000원).
조선업체는 6개월 후 15만 달러를 계약자로부터 받고 이를 곧바로 은행에 넘겨준다. 그리고 은행은 그에 상당하는 원화 1억5000만 원을 조선업체에 지급한다. 이 때 조선업체의 예상대로 환율이 1달러 당 900원으로 내려갔다면 조선업체는 달러당 100원의 이익을 보게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은행이 조선업체가 회피한 환위험에 노출된 셈이다. 은행 역시 이러한 환변동 위험을 없애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쓰게 된다. 조선업체와 맺은 선물환 계약 50만 달러에 상당하는 자금을 환율이 높은(즉, 원화가격이 싼) 선물환 계약 체결 시기에 곧바로 해외에서 차입하면 된다. 이렇게 발생한 외채는 은행이 다시 국내에서 현물 외화로 유통시킨다.
따라서 언론에서 '모 조선업체가 노르웨이 항만사와 벌크선 1척 수주 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나오더라도 당장 국내에 유입되는 달러화는 차입금, 즉 국내 은행이 해외에서 끌어온 빚에 불과하다. 실제 조선업체가 벌어들인 자금은 수년 후에나 국내로 들어온다.
조선업 불황 덕분에 외환시장 안정?
2008년 이른바 '미네르바 사태' 당시 국내 외환보유액 소진 논란이 빚어진 주된 이유도, 한국의 신용위험이 급격히 치솟았다는 외신의 보도가 연이었던 이유도 한국의 외화차입이 많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조선업의 신규 수주액이 줄어드는 최근이 오히려 외환시장을 뒤흔들 가능성이 적다.
실제 업계와 은행권에 따르면 대형 조선업체 3사(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의 선물환 순매도 규모는 최근 들어 크게 줄어들었다. 작년 현대중공업의 선물환 순매도 규모는 60억 달러어치였으며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각각 50억 달러, 10억 달러를 헤지했다.
이는 3사 합계 360억 달러를 선물환 매도했던 2007년 당시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 지난 1월 국내 조선사의 글로벌 발주량은 작년 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업계의 예상이다.
한은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국내 조선업체의 수주는 부진할 것"이라며 "이에 따라 국내 조선업체의 선물환 매도 압력이 크게 줄어들면서, 외환부문의 교란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전망일 뿐이다. 만에 하나 조선업이 예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침체를 이어간다면 한국 경제 자체가 큰 타격을 입는다. 조선업 수출은 한국 경제 전체의 10%대에 달한다. 조선업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실제 최근 외환시장이 완전히 안정을 찾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조선업의 어려움이 길어지면 결국 한국 경제를 어둡게 전망하는 심리가 글로벌 자금시장에 퍼져, 결과적으로 외환시장에 또 다른 타격을 입힐 수 있다. 한은은 필요한 대응은 조선업체의 선물환 매도에 따른 외환시장 충격을 흡수할 장치 마련이라고 조언했다.
한은은 "금융회사 등 시장참가자들과 정책당국이 외환시장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해 조선 경기 회복 시 예상되는 선물환 매도에 따른 충격을 자체적으로 흡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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