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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밀도 있는 눈물예찬, 배우 길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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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밀도 있는 눈물예찬, 배우 길해연

[人 스테이지] 연극 '꿈속의 꿈'의 또 다른 아픔, 문희

사람을 만나는 일은 기쁘고도 고단하다. 모두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기계적으로 안부를 묻는다. 만나는 동시에 돌아서기를 반복하는 무의미한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친다. 게다가 단 한 번의 만남으로 행복을 얻기란 더욱이 불가능해 보인다. 있지 않을 것 같은 그 적은 확률을 적중시키며 활력을 주는 배우, 추위와 긴장으로 언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소녀 같은 미소를 건네는 배우가 있다. 그와 같은 진심으로 연극을 바라보기에 그녀의 무대는 더욱 단단한 기쁨과 묵직한 슬픔으로 관객을 흔들지도 모른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낭독회에 참여하고 책을 내고 영화와 연극을 오가면서도 무대에 오르기를 쉬지 않는 배우 길해연. "사실 저는 천성이 느리고 게으른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살게 됐지?" 힐러리보다 더 바쁜 '길러리'로 불리는 그녀가 정말 소녀처럼 웃는다.

▲ ⓒ프레시안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예측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갈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동안 남이 겪지 않았을 법한 일들을 많이 만나며 아프고 외로웠죠. 내가 너무 많이 변했어요. 아마도 연극을 했기 때문에 더 변한 것 같아요. 한 세상 살면서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겪고 더 많이 슬퍼하고 또 일어서는 삶. 저는 이 길을 가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장기적이고 거대한 계획보다는 이 순간에 충실할 뿐이라는 배우 길해연이 말한다. "오늘 이 자리가 기뻤으면 좋겠고 오늘 연습이 재밌고 신났으면 좋겠어요. 제 인상은 점이예요. 점, 점, 점을 모아서 살고 있지 큰 선으로 사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면에 만족하고 있죠."

- 아플 겨를도 없는 삶에 대한 이해, 그리고 희망

▲ ⓒ프레시안
대학로 어느 골목에 위치한 마방진극공작소. 작지만 연극냄새 폴폴 나는 이곳에서는 지금 연극 '꿈속의 꿈' 연습이 한창이다. 연극 '꿈속의 꿈'은 보희와 문희의 '매몽설화'를 모티브로 한다. '매몽설화'에 숨겨져 있는 인간 욕망의 추구와 좌절을 그리며 삶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에서 배우 길해연은 문희 역을 맡았다. 연극 '꿈속의 꿈'에는 더 강하고 더 처연한 유신, 춘추, 보희, 그리고 문희가 있다. "이 인물들은 사회나 욕망 등 때문에 각자의 가면을 쓰고 있어요. 자신의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지만 안에 있는 것들은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죠. 문희 마지막 대사에 이런 게 나와요. '탈을 쓰고 헛 웃고 거짓 울었습니다. 그래서 아파도 아픈 줄 몰랐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그렇게 살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어요. 우리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까요?"

2008년 서울연극제 대상, 희곡상을 거머쥔 이 작품으로 배우 길해연은 연기상을 받았다. 그녀는 원래 자기 것을 가져간 것처럼 문희를 연기했다. 어쩌면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 하나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보희는 굉장히 큰 인물이에요. 모든 걸 다 껴안고 가죠. 제가 그걸 연기로 잘 표현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제가 사는 현재의 삶이 문희와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아요. 화려하고 당당해보이지만 아픔이 너무 많아요. 저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싶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아픔들을 다 끄집어내어 아파할 겨를이 없잖아요. 남들 앞에서는 괜찮다고 하고선 속으로 많이 울지만 울 겨를도 없는 사람들." 아픔을 알고 있는 배우 길해연은 그만큼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위로한다. 그것이 또 하나의 보람일까. 진짜 '사람'을 연기하는 그녀에게 배우로서 만족할 때가 언제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없다'였다. "난 근데 참 열심히 안하는 것 같아. 돌이켜보니 만족스러운 게 하나도 없거든요. 저는 아직도 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요. 가끔은 신경질도 나고. 이번에는 여기까지밖에 못했구나 생각이 들지만 잘해야지 마음만 먹는다고 잘해지는 게 아니라서. 저는 엄격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엄격하더라고요. 스스로에게 불만족스럽고 인정도 안 되고.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 ⓒ프레시안

- 사막에 한 초롱의 물을 뿌리는 심정으로, 그렇게 영원히

고등학교 당시 연극 '무덤 없는 주검'을 본 길해연은 충격을 받았다. 그게 배우가 된 근원적 계기였다. 그녀는 연극이 가진 진정성과 철학적 사유, 삶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는다. "연극이 갖고 있는 존엄성이랄까. 너무 거대한가요? 선생님들을 뵙고 같이 있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들이 가진 연극에 대한 경외심이에요. 그게 있었기 때문에 견디고 해온 것 같아요. 연극을 우습게 알면 절대로 연극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배우 길해연은 가끔 어린 후배들이 안타깝기도 하다. "학생들이 종종 이렇게 이야기해요. 연극을 하고 싶은데 경제적인 부분이 걱정이 된다고. 그들은 영화 오디션을 통해 비상하기를 꿈꾸죠. 그렇다면 저는 꼭 연극을 하라고 안 해요. 무조건 극단에 들어가서 고생해라, 이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죠. 연극을 발판삼아 영화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이곳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그런 목표를 갖는 친구들을 보면 안타깝죠."

▲ ⓒ프레시안
23년 전, 극단 작은 신화를 창단할 당시 배우 길해연 역시 어린 학생이었다. 창단의 정신은 '사막에 한 초롱의 물을 뿌리는 심정으로'였다. "그만큼의 물을 뿌려도 사막은 변하지 않아요. 사막을 변화시켜 무언가를 이뤄내겠다는 거대한 목표가 아니라 우리는 그저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거죠. 당시에는 극장의 저변확대라고 카페 순회공연도 했었어요. 공간이 없으니까. 그게 23년이 지났네요. 저희끼리는 10년만 하자고 그랬어요. 10년이면 뭐가 될 줄 알고." 10년 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에이, 10년만 더하자.' 그리고 지금까지 왔다. "그래도 역시 많이 달라진 건 없죠. 그저 그냥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저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인 그들로 인해 연극은 점점 단단해진다. 그녀는 이것을 관객과 함께하길 원한다. "어렵긴 해도 이건 누가 만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고 그걸 원하는 관객이 그 토양을 만들어가고 지켜나가면서 생성되는 거죠." 그리고 다시 한 번 연극 '꿈속의 꿈'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꿈꾼다. "유신, 춘추, 보희, 문희의 가면을 보면서 나는 지금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 거예요. 안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다르죠. 극장을 나가면서 한번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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