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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철학자의 서재]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상처받은 마음을 찾아서

서점에 나가보면 시대의 화두를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먹고사는 직설적인 문제에 대한 온갖 변죽 울리기 방편들―경제와 주식투자, 각종 처세법과 성공한 이들의 자기 최면용 서적들 ―한편에 나름의 또 다른 트렌드가 있는 듯하다. 이른바 위로와 치유의 책들이다.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각종 심리학책도, 그림에 관한 책도 부제로 '치유'와 '위로'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 상처받은 마음이 있다. 세상살이는 힘들고, 경제적 추락은 어떤 스펙에서도 가능한 잠재적 사건이며, 인간관계는 비뚤어져 있고, 어떤 형태의 정직도 결국은 손해를 본다. 그래서 내 안의 어딘가, 그것을 마음이라 부르건 영혼이라 부르건 상관없이, 세상과 나를 다 상대하는 어떤 부분이 이 혹독한 전장 한 구석에서 울고 있다. 그래서 위로와 치유가 필요하다. '세상살이의 혹독함과 상처받은 마음'은 시대를 관통해 저변으로 흐르는 지하수처럼 보인다.

세상살이는 본래 힘들었다. 100년 전이 지금보다 나았다거나, 100년 후가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고통의 양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자기 고통에 대한 민감도일 수도 있다. 과거보다 삶의 조건이 더 나빠졌다기보다는 자기의 조건을 견디는 능력이 약해졌다고 해야 할까. 우리 대부분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야 하는 갈등이 더 커졌는데도 그것을 견디는 견고함은 한참 뒤떨어지는 허약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상처받은 영역으로 보고 또 위로의 대상으로 여겨 자기 치유를 시도하는 심리 안에는 분명 모종의 결여와 피해의식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치유로서의 철학

▲ <엥케이리디온>(에픽테토스 지음, 김재홍 옮김, 까치 펴냄). ⓒ프레시안
철학자들은 철학이 내면에 대한 치료의 과정이라고 말해왔다. 철학을 의술에 비유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일반적 어법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us) 역시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치료로서의 철학"을 말한다. 그 자신이 노예로서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살았을 에픽테토스는 자기를 방어하고 지키는 방법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야 방해와 힐난과 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말한다.

"네가 사실상 너의 것만을 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어떤 때고 너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사람을 힐난하지 않을 것이고, 자의에 의해서 결코 한 가지라도 행하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적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에픽테토스는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인 육체나 사회적 평판, 재물 같은 것을 추구할 때 불행이 올 것이며, 오로지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추구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고 충고한다. 그것이 자신을 방어하고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기준이야 그때와 달라졌다 할지라도,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욕심을 끊고 외부의 변화에 그대로 순응할 수 있다면 사는 일이 좀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짜 세상살이의 어려움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제한적이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만약 실제로 나에게 불행이 닥친다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조건들 때문에 불운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픽테토스는 여기에 대해서도 대답한다. 사람들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들에 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죽음 자체가 아닌 죽음에 관한 믿음, 즉 두렵다는 것이 바로 두려워할 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에픽테토스는 한 발 더 나아가 일상에서 부딪히게 될 상실을 견디는 법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에 애착이 생길 때, 심지어 가족일 경우에도, 그 대상에 입을 맞추며 '나는 한 물건 또는 한 인간에게 입을 맞추고 있다'라고 말하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사물의 본질을 상기한다면 그것을 잃더라도 심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내나 자식이 죽었다 해도 단순히 되돌려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슬프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지구 반대편의 장자(莊子)로부터도 들은 바 있는, 죽음을 자연적 질서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충고는 스토아 철학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다.

무엇인가를 상실했을 때, 빼앗아 간 사람들을 원망하기보다 그것을 주었던 사람이 누군가를 통해서 나에게 되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에픽테토스는 만약 올리브유를 쏟거나 포도주를 잃어버렸다면 '이것은 무감동(apatheia)을 사기 위해서 치러야 할 그만한 값이고 이것이 마음의 평정(ataraxia)을 사기 위해서 치러야 할 그만한 값'이라고 생각하라고 한다. 그래야 외부 세계에 묶이지 않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매일 자기 내면을 근육으로 바꾸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는 밖의 변화를 향하는 모종의 실천이라기보다는 내면의 변화를 향한 자기 개조 프로그램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훈련 코스를 다 통과한다면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는, 방어할 필요가 없는 단단한 영혼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스토아적 현인으로서 세상사에 관계없이 평정한 상태가 되어 주변까지 평화롭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매일 복잡다단한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소시민에게는 요원한 세계일 것이다.

평정과 불안 사이

외부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변화에 영향 받지 않는 내적 평정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철학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마음의 상태들이다.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자유는 일종의 자족으로, 정념이 없는 상태인 무감동과 마음의 평정을 의미한다. 이처럼 철학을 통해 외부와 관계할 때 생기는 온갖 감정적인 것들에 대해 무관심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함으로써 외적 가치로부터의 자유, 즉 자족성에 도달하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위안과 치유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이런 식의 위안과 치료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에픽테토스가 강조하는 자신에 대한 절제와 무관심, 타인에 대한 공감과 관용은 그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삶의 불안을 씻고 안정으로 올라설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의 평정과 타인에 대한 관용이 외부의 사물과 사건의 압력으로부터, 그 압력의 잔재인 마음의 동요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길이라면 어쨌거나 한 번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그러나 정말 이런 무감동과 마음의 평정으로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까. 현자라기보다는 소시민에 가까운 우리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스토아 철학이 주는 해법은 과연 이게 다인가. 수긍하면서도 어쩐지 답답하고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세계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세계를 감관(監觀)하고 수용하는 방법을 통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쩐지 무력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건, 에픽테토스가 고민하고 치유하고자 했던 현실보다 현재가 더 폭압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차로 해명되지 않는 현재 우리의 특수한 조건들, 즉 깎여갈 강바닥을 바라보는 상실감, 불타는 건물 속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비참함, 건물 잔해 속 어딘가에 아직도 갇혀 있을 사람들을 바라보는 절망감, 누군가 억지로 식별한 이름 아래 분류되어 살아갈 무구한 이들을 바라볼 때의 무력감, 여전히 매 맞는 이들을 바라볼 때의 처절함 같은 것들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나에게 속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해서 평정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 외적 조건들이 사회와 개인에게 가하는 너무도 분명한 폭력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치유로서의 철학의 길이 무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잊고 지내는 방법 밖에는 배울 수 없다고 좌절하게 된다. 어쩐지 아직은 스토아적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되 치졸한 연민으로 타자화하지 않는 것, 무감동과 평정을 통해 온갖 상실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는 무력감과 좌절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을 자유

그러나 가만히 들어보면 이런 식의 이해는 스토아 철학의 표피만을 긁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스토아 철학이 순응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들이 말하는 인간이 철저히 자연에 구속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운명에 의해 인과적 연쇄를 이루며,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 밖의 필연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면 여기서 자유를 끌어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스토아적 인간은 단순히 필연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가 우주의 질서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인간은 이성을 통해 그 법칙 자체를 이해함으로써 법칙 안으로의 차폐를 벗어나 밖을 향한다. 이성을 통해 인간은 우주의 질서와 그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의 지배에 참여할 수 있다. 신적인 이성은 초월화되지 않으며 인간의 내부로 만입되게 된다. 운명 앞에서도 자유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인간이 세계에 대해 자유롭다는 것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이 자유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인간이 감각을 통해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한 단계 더 나아가 자기만의 이해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감각은 외부 사물을 받아들이는 통로지만 그것을 식별하는 인식은 나의 내면에 있다. 그것이 바로 표상이다. 어두운 방의 조명처럼 표상은 감각을 통해 주어진 것들을 판별한다.

그렇지만 감각과 표상은 철저히 외적인 조건에 따르기 때문에 이로부터 자유를 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자유를 말하려면 감각과 표상 다음 단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동의(synkatathesis)다. 동의는 표상이 대상과 일치하는가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선택의 판단이다. 동의는 외부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에,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표상은 외부에 묶여 있지만 동의는 철저히 내적인 사건이라는 의미다.

동의로부터 자유가 온다. 동의는 표상하는 사람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어떤 외압에도 우리는 일종의 실천적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자유는 이렇듯 내면에서 외부를 승인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이성적 의지에서 비롯된다. 나에게는 외부 세계를 승인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동의의 자유가 있다.

우리는 이 문맥에서 스토아 철학의 충고를 뒤집어 '동의하지 않을 자유'를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상과 표상의 관계가 비자연적이거나 혹은 악의적일 때, 나에게는 그 상황의 옳지 않음을 인식하고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타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무관심, 경제 논리로 모든 것을 잠식하는 과도한 집중력,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는 폭력의 기술들 앞에서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윤리적 관점에서 '의견의 자유'란 무엇보다도 악을 지명하는 자유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일어날 일대로 흘러가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윤리적 책임으로서의 의견의 자유, 다시 말해 악을 지명할 자유가 있다. 이를 스토아 철학의 방식으로 읽자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나에게는 외부 상황에 대해 악을 지명할 자유가 있으며, 그에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이것은 이성을 가진 나의 몫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자유를 이용해 악을 지명하고 악이 자행되는 외부 상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비자연적인 힘'에 굴복하지 않고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음은 일견 수동적인 해결로 보이지만 사실 가장 능동적인 실천의 시작일 수 있다. 모든 의미 있는 실천은 동의와 공감의 차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의를 거부하는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내 태도와 실천을 정하는 기본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그리고 이 상황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이 개인의 한계를 넘어 폭주하는 현재의 이 땅에 여전히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내가, 상실을 견디고 자유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나는 오늘도 말한다. 나는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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