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시안 |
평야를 지나는 늙은 기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옆에는 종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있다. 그들이 풍차를 향해 간다. 나와 같은 꿈을 꾸나 싶었다. 아뿔싸! 갑자기 그가 풍차로 돌진한다. 이어 만신창이가 돼 돌아온다. 그러더니 변장을 한 거인이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름을 물었다. 이름만 물었을 뿐인데 늙은 기사는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썩을 대로 썩은 세상, 죄악으로 가득하구나. 나 여기 깃발을 높이 들고 결투를 청한다. 나는 돈키호테, 라만차의 기사, 운명이여 내가간다. 거친…….' 아, 이 비장한 눈빛의 기사 이름이 돈키호테다. 그런데 기사라고 하기엔 좀 늙었다. 그리고 관절염에 걸렸는지 부실해 보인다. 칼을 들 기력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산초와 함께 황당한 모험을 시작한다.
- 가장 초라한 몸으로 가장 큰 꿈을 꾸는, 세상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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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돈키호테를 비웃는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진지하다.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돈키호테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친절과 예의, 용기를 온 몸으로 실천해낸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 돈키호테가 우스워서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는 우리에게 세르반테스가 소리친다.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미쳐 보입니까? 아니요, 아니요!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짓이 될 수도 있다오. 그중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과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죠!" 제정신이 아닌 세상에서 문제없이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 미친 게 아닌가. 정신없이 돌아가기만 하는, 풍차 같은 현실을 향해 돌진했다가 호되게 당하고 돌아오는 돈키호테가 말없이 우리를 다그친다.
- 불가능한 꿈을 이룬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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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위엄 있는 기사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늙은이 알론조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 그는 비참해진다.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비난 받았을 때도 찾아오지 않았던 절망이 이제 검은 옷을 입고 다가온다. 이상과 꿈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삶, 남은 일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뿐이다. 절망하는 알론조, 황당한 돈키호테, 작가 세르반테스, 이 모든 것을 표현하는 정성화의 연기는 대단했다. 그의 진지하면서도 익살맞은 모습들을 보는 동안 인간 정성화는 보이지 않을 정도. 산초의 이훈진과 알돈자의 김선영을 비롯, 모든 조연 및 앙상블들 역시 속이 꽉 찬 무대를 선보였다. 인간을 체스 말로 비유해 상황을 체스로 묘사하는 등의 재치와 적절한 무대변화, 매력적인 캐릭터와 마음을 울리는 음악의 결과는 커튼콜에서 나타났다. 쏟아지는 기립박수 한가운데 돈키호테가 서 있었다. 우리의 잃어버린 꿈의 모습을 하고 꿋꿋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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