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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눈물'을 즐기는 '관음증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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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눈물'을 즐기는 '관음증 환자'

[철학자의 서재]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인간 눈의 흰자위

다른 영장류와 달리 인간의 신체가 가진 독특한 비밀들 중 하나는 바로 눈, 그 중에서도 흰자위에 있다. 눈의 흰자위는 자신이 어디를 보는지 드러내기 때문에 싸울 때 공격받기 쉬워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불리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인류의 선조는 비교적 싸움이 적은 사회를 형성하며 흰자위를 감추지 않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상대방을 응시할 수 있어 종전처럼 표정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더 섬세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눈에 있는 흰자위는 유대감과 협력에 기초하여 집단의 생존을 도모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영위하던 인간사회의 진화론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흰자위가 이후 인간의 역사에서 생존을 위해 더 긴급하게 응시해야 했던 것은 동료의 눈이 아니라 적의 심장을 겨누는 칼이나 총부리일 때가 훨씬 많았다. 전쟁이 표준적인 상황이고 평화가 예외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신체에 새겨진 공감하는 능력과 소통하는 능력은 퇴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우리들이 전쟁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은 주로 TV나 다른 시청각적 매체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만행을 안전한 곳에서 느긋하고 익숙하게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인가. 아니면, 미디어와 저널리즘이 선택하고 조작해서 알려주지 않으면 제주도나 광주에서 다시 끔찍한 학살이 일어난다고 해도 모르고 살아갈 도시에 은둔하는 사람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인 갑남을녀들인가.

'우리'가 이러할진대 '저들'을 규정하거나 속단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저녁 뉴스의 스쳐가는 이미지 속에서 울부짖는 이름 모를 그들이 왜 저러고들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면 바쁜 사람들은 더욱 여유가 없어지게 될까.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것도 그들의 고통을 나의 삶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도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타인들의 전쟁은 우리들의 구경거리가 아니다. 그들이 겪는 실제 현실에 공명하고 그것을 이해하거나 개선하는 것이 비록 우리에게 난망한 일이더라도, 손쉽게 그들을 연민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그들과 우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에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 같다.

잠깐의 연민을 통해 마음의 부담이나 복잡한 생각들을 잊을 수는 있지만 그들을 타자화할수록 그들의 존재는 현실에서 지워지고 가상 속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관계에서는 보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보이는 그들에게 또 다른 타인일 뿐이며 의미 없는 존재가 된다. 우리들이 '자살 폭탄 테러' 피해 소식을 접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고 해서 그 현장의 사람들도 그 고통에 적응하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위무하는 것은 연민이 가져오는 얼빠진 착각이다.

전쟁 이미지를 수용하는 방식

타인들의 전쟁과 그들의 고통을 둘러싼 도상(圖上)들을 보는 것만으로 그들의 아픔이 경감될 수 있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공유하리라. 그러나 고통스러워하는 타인들을 이미지로 보게 될 때 그 고통이 발생하는 곳으로부터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물론 물리적인 거리가 심리적인 거리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것에 공감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런 장면이 반복적으로 비춰질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도감을 느끼기보다는 공포나 환멸 같은 불쾌한 감정 혹은 '내가 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무기력으로 인한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그 자극에 둔감해지게 될 것이다. 유사한 패턴의 반복적인 이미지들은 시각적 자극의 홍수 속에서 좀 더 강한 것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식상함을 불러일으키며 그 반응 주기 또한 짧게 만든다.

태풍, 지진해일, 지진 등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소식도 1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그 안타까움이 감소하는데, 21세기 들어 끊임없이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과 팔레스타인의 소식들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충격과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하물며 엄청난 인명이 학살되어도 지구촌 소식의 뉴스거리로 선정되기도 힘든, (흔히 국가 이름 대신 아프리카로 싸잡아 부르는) 저 가난한 대륙의 내전이야 말해 무엇 하랴. (물론 오늘날 일어나는 거의 모든 전쟁과 내전의 역학 관계에는 미국의 대외 정책이 포함된다.)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으로 인해 겪는 고통보다,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쟁의 폭력과 고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보다 덜 공감하고 덜 사유하고 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인간사의 일이기 때문에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이구나'라는 경각심이 약화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인식은 보다 약화되고 책임을 회피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우리가 연민이나 자기 위안을 통해 현실의 폭력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폭력의 이미지에 익숙해져 현실로부터 눈을 닫아버리는 불감증이다.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 존재를 대상화하는 사진

▲ <타인의 고통>(수전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이후 펴냄). ⓒ프레시안
전쟁을 TV 속 하나의 이미지로 바라보면 전쟁은 어떻게 보이는가. 끔찍한 폭력을 겪고 죽거나 다친 사람들, 고통에 절망하고 슬퍼하는 실제의 사람들은 이미지 속에서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하여 보는 사람의 처분에 맡겨진다. 그런 면에서 찍고자 하는 대상에 접근하여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는 인간을 쏘는 총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살아있는 존재를 대상화한다는 측면에서, 곧 타인을 사물화·수량화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폭력이 폭력의 피해자를 사물로 바꾸기에 잘못된 것이라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의 속성엔 살아있는 존재를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어떤 폭력성이 있다.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이재원 옮김, 이후 펴냄)은 새로운 감수성을 통해 미국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을 했지만 2004년에 작고한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저서이다. 이 책은 때로 '우리'라고 같이 묶이기도 하는 타인들의 고통, 아니 그보다는 타인의 고통이 담겨진 이미지들이 다루어져 온 방식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대하는 주관적 내면에 관해 보다 덜 학술적으로 성찰한 에세이이다.

저자가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사진 기술이 발명된 이후에 일어났던 전쟁, 폭력, 죽음, 고통의 도상들이다. 오늘날 시청자나 독자에게 수용되는 전쟁과 관련한 저널리즘의 사진들은 먼 거리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타인의 고통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통용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방식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몇몇의 이미지들을 접하며 내 등골이 서늘한 이유는 그 사진들이 공포스러운 전쟁과 죽음의 이미지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관음증 환자처럼 그것을 시각적 자극으로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저자도 말하고 있듯이 고통 받는 육체를 보려는 욕망과 나체를 보려는 욕망은 인간에게 있어 근본적이며 격렬한 것이다.

불가결하게 어떤 의도를 배제할 수 없는 포토저널리즘의 욕망과 그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내적 욕망이 조우하는 장으로서 사진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설령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 연출하지 않더라도 사진 속의 인물들이 어떤 조작을 연출할 수도 있다. 사진은 의도된 선택과 조작으로 현실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사진 속의 현실과는 떨어진, 보는 사람의 내면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지에 대한 우리들의 관음증 속에서 실제의 리얼리티는 사라지기 쉽고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우리들의 인식은 날 것의 총체적인 현실에 닿지 못한다. (리얼리티도 주관적으로 인식된 속성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재현될 수 있는 리얼리티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진은 리얼리티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보다 더 '리얼'한 것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 이미지는 언제나 특정한 정세와 사태 속에 있는 현실의 구체성과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측면에서는 탈정치적이다.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아주 먼 곳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싶은) 고통에 일그러진 그들의 표정은 우리를 불안과 고통의 전염에 빠져들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사진 속 그 고통의 현장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사진의 역할은 서사와 달리 현실의 사태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프레임의 이미지로 우리를 쫓아다니며 기억의 지층들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사진 이미지가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화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 이미지에 포섭되고 유도되어 대상화되지 않는 내적 긴장감, 즉 현실(사진을 보고 있는 현실과 사진 속의 현실)로 삼투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통 속의 타인, 그들은 누구인가

모든 인간은 늘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 그 인간의 이름을 묻고 부른다는 것은 '나는 당신을 존중하며 당신과 소통할 의사가 있어요'를 의미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며 의지할 데 없이 무력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제3세계 사람들을 찍은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의 초점에는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시킨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그 사진 아래에 달려 있는 설명에는 그가 찍은 무력한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일종의 집합체로 간주되며 익명의 희생자들의 이미지로 다루어진다. 그렇게 피사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인물 사진은 유명인들 숭배 풍조를 강화시킨다. 그러한 관습 속에서 호명되지 못한 인간은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땀과 눈물과 웃음이 묻어나는 저마다의 서사를 가진 현실 속의 개인들이 '고난에 처한 인간'으로 획일화된다면 서로 다른 현실의 고난들은 뭉뚱그려지고 추상적인 것이 된다. 또한 사진 속의 어떤 고난을 실제보다 과장해 전 세계적 차원의 것으로 묘사하면,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은 그 문제에 지역적으로 개입하여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의욕을 잃을 수 있다.

광대한 우주의 푸른 한 점 위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고통 받는 타인에게 필요한 것이자, 우리가 진정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연민의 시선이 아니라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타인들의 사진 속에 그들의 이름을 삽입하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그들만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의지를 드러낼 것이며 그 의도는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이미지를 벗어나 현실 속의 인간을 보라

'타인의 취향'이나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먼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 타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약자와 소수자들이다.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아픔에 같이 공명하고 그들의 즐거움에 같이 기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존엄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불타는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소리치던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가로 막은 것은 막무가내식의 경찰 진압, 자기 증식의 욕망에만 눈이 먼 자본, 혹은 정치 권력을 손에 쥐고 그 자본의 충실한 개가 되기를 자부하는 자들, 수준 이하의 저널리즘이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가로 막은 것은 나 자신이 갖고 있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곧 우리가 세계에 길들여진 방식으로 다시 세계를 욕망하는 우리의 존재양식이 아닐까.

재화를 축적하고 권력관계를 형성하여 문명을 일구기 시작한 이래, 인간은 어떤 기준에 의해 나와 다르다고 생각되는 인간을 같은 동류로 보지 않는 획일적인 기준과 신념 체계를 끊임없이 강화하는 제도적·문화적 장치들을 계발해왔다. 그 장치들은 일종의 집단 환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주술이었다. 오늘날에도 '이윤보다 인간을! 효율보다 인권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강력한 그 주술을 떨쳐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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