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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불치병 '아바타 우울증'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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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불치병 '아바타 우울증'의 탄생

[기고] 아바타 우울증이 알려주는 것

판도라가 그리운가?

판도라에선 한밤중 풀숲을 지나가면 발자국은 호박 등처럼 환해진다. 벌레와 작은 파충류, 날아다니는 식물의 씨앗은 청명하고 고요한 밤에 갑자기 은은한 등불을 켜고서 연인의 얼굴을 환히 밝힌다. 놀라운 영장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가 오래 원해온 모습대로, 아름답다. 어느 것 하나 조화의 거대한 질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불행을 겪지 않는다.

놀랍게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연상시키며, 앉은뱅이도 아바타에 들어가면 한순간 벌떡 일어서 뛰어다니는 곳이 바로 판도라이다. 아바타에 들어가라, 걸을 것이다. 아바타에 들어가라, 눈을 뜰 것이다. 이런 구세주의 공식들이 메아리치며, 에덴을 놀이공원화한 판도라의 밤은 황홀하고 깨끗하고, 마침내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판도라가 이렇게 행복할 때, 지구에선 정말로 믿기 어려운 신문 기사가 올라온다. 이 영화 속 판도라 행성에 가지 못해서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단다. 바로 '아바타 우울증'에 감염된 것이다.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세계가, 작고 못생겼으며 자신에게 늘 불리한 화폐의 질서를 존중해야 하는 어떤 포유류(인간)가 지구에서 보내는 나날을 참혹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아바타>에 대해 우리는 흥행을 목적으로 한 할리우드의 다른 성공작에 대해서처럼 잠깐 동안의 즐거움 외에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아울러 이 영화는 치명적인 단점마저 지니고 있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구하는 백인 영웅을 등장시켜서 비난받고 있으며, 사이비 교단에서 모시는 우상처럼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여신 또한 줄거리의 견고함을 깨트리는 한심한 요소로 비춰진다.

요컨대 <아바타>는 영화의 혁명도 아니고 오락의 혁명도 아니고, 더군다나 사상의 혁명도 아니다. 다만 우울증이라는 질병을 가져온 다소 독특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기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모든 질병과 마찬가지로 '아바타 우울증'은, 하나의 질병으로서, 그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인류학적 취향의 영화 <아바타>

<아바타>는 거의 최초로 3D의 위력을 가장 넓은 폭의 대중을 향해 안정적으로 드러낸 영화이긴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SF 발전의 향방을 가늠하게 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인류학적 취향'을 지닌 영화다. 사실 <아바타>는 외계가 아니라, 서구 문명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은 지구상의 어떤 가상적인 대륙의 원주민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고 감독했던 <늑대와 춤을>의 주인공처럼 서구 문명의 사악함에 눈뜬 다음 이국적이며 완벽해 보이기까지 하는 순수한(?) 사회 질서에 동화되는 인물이 바로 <아바타>의 주인공이다. <아바타>의 원주민들을 떠올리며 다음 인용을 읽어보자.

"그들 모두에게서 무한한 친절, 깊은 무관심, 그리고 소박하면서도 매력적인 동물적 만족감을 보게 되며, 이러한 갖가지 감정들이 모인 곳에서 인간적인 애정의 가장 감동적이며 가장 진실된 표현 같은 무엇을 느낀다."

이것은 바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쓴 <슬픈 열대>에 나오는 남비콰라 족에 대한 한 구절이다. 우리는 이상적인 사회를 묘사한 이 구절에 해당하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판도라의 원주민들 속에서 다시 발견한다. 서구 문명은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난 그 기원적인 날부터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를 품고서, 온갖 방법을 통해 그 낙원의 향기를 맡아보고자 하였는데, 사실 <아바타>도 그런 서구인의 무의식적 노력의 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찬미는 사실 서구인의 '양심의 가책'과 연결되어 있다. <아바타>는 원초적인 사회를 침략하는 서구인의 양심의 가책을 거의 교과서적이라 할 만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판도라 행성의 한 부족이 거주하는 거대한 나무를 최첨단의 온갖 무기를 동원해 마침내 불타오르고 쓰러지게 만드는 장면 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침략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군인마저 생긴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서구가 인류학자들을 만들어내었다면, 그것은 서구가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사회의 이미지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아바타>가 '인류학적 취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서구 인류학자의 시선을 얼마간 영화 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와는 전혀 다른 관심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순수한 사회가 서구의 욕망에 희생되는 모습을 포착하는 시선 말이다. 물론 이런 가책의 시선 자체는 지금에 와서는 실질적인 정치적 위력을 내포하기 보다는, 문화 안에서 소모되는 연극의 한 조미료 같은 것이 되었지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가책으로부터 면책 받는 교묘한 수단이 되었지만.

과학이 에덴을 돌려준다?

어쨌든 서구 문명에 염증을 느낀 대중은 <아바타>를 통해 에덴과도 같은 순수한 '기원적' 사회를 그리워한다. 이 그리움을 '자신이 지닌 유일한 무기인 화폐'를 통해 충족시키지 못하는 문명인의 어린애 같은 신경질이 바로 아바타 우울증이다(바로 이런 까닭에 인류학자의 속죄와는 별도로 이 우울증은 욕심의 충족을 노리고 있기도 하다).

영화 내재적으로는 어떤가? 어떻게 우울한 앉은뱅이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자처럼 일어서는가? 어떻게 문명의 모든 과오를 잊고서 순수하고 원초적인 사회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을 실현시켜주는 근본적인 것은 기적이나 구원 같은 것도 아니며, 어떤 희생이나 봉사 같은 윤리적 덕목, 그리고 이런 것들을 떠받혀줄 만한 어떤 '노력'도 아니며, 간단히 '첨단 과학', 바로 잘 만들어진 인형인 '아바타'이다. 쉽고 거칠게 요약하면 과학이 에덴을 돌려준다는 것이 이 영화의 믿음이다…….

▲ 영화 <아바타>의 유토피아(판도라)는 결코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듯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완전하게 보이는 원초적 사회를 향수에 못 이겨 억지로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을 뿐이다. ⓒ프레시안

과학의 '필요조건'인 문자 vs 문자 없는 세계 판도라

그런데 재미있지 않은가? 에덴 같은 순수하고 원초적인 사회는 가령 '문자'를 가진 적이 없었다. 반면 아바타를 창출해내는 과학은 문자를 필요조건으로 삼는다. 가령 외국인과 만났을 때 수학이야말로 만국의 공통 문자가 된다. 음성 언어 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통해 (그리고 문자를 통해서만) 의미가 전달되니까 말이다.

수학이 본질적으로 문자에 의존하는 학문이라는 것은 음성 언어를 통해 발음될 수 없는 문자들(기호들)을 통해서만 존립하는 수학의 특성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런 취지에서 문자를 연구했던 페브리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음성 언어와는 더 이상 어떠한 관계도 없는 특수한 하나의 언어(수학)이다."

철학자 데리다 역시 과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문자의 근본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렇게 강조한다.

"문자가 과학의 '필요조건'이라는 점과 문자 없이는 과학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적 문명에 의해 때 묻지 않은 원초적 사회는 문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문자가 '자연에 위배되는 인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문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문자가 신석기 혁명의 필요조건은 아니었다."

이런 사정이 우울증을 창출한다. 순수한 기원적인 것, 가령 판도라의 부족 사회 같은 것은 인위성을 대표하는 문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라. 추장의 딸인 여주인공은 미국인 아바타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지만 문자를 가르치진 않는다. 여기 중요한 진실의 한 국면이 있다. 사실 판도라의 부족은 인위적인 문자가 필요 없는데, 말(馬)이나 새와 교감 할 수 있는 더듬이처럼 생긴 '자연적 소통 기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결코 문명화된 지구인에게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듯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완전하게 보이는 원초적 사회를 향수에 못 이겨 억지로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을 뿐이다. 바로 과학과 문자의 세계, 그리고 그 결과물인 아바타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그러니 원초적인 기원적 세계는 아바타 또는 문자(또는 과학)라는 인위적인 고안물이 '대리자가 되어 줄 때만' 주어지는 것이다.

영화 <아바타>가 일으킨 우울증이 숨기고 있는 진실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인류는 에덴으로 돌아가길 원해 왔으며, 그러기 위해 지금껏 온갖 인위적인 것들을 버리기를 자신과 타인에게 요구해 왔다. 인위성을 대표하는 문자 역시 여기, 폐기해버릴 것의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영혼 없는 인형 아바타'가, 또는 아바타를 만들어낸 인위적인 과학이, 바로 '문자'와 '수식(數式)'이 잃어버린 세계를 돌려주리라. 그러니 사람들이 앓는 아바타 우울증은 두 개의 서로 상반되어 보여 왔던 세계를 결합시켜 보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그 욕망은 이렇게 말한다. 인류는 단 한 번도 원초적이고 자연적이며 태생적인 순수한 낙원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되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비순수의 극치인 '인공물'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과학은 원초적인 순수한 상태로부터 영원히 더욱더 멀어지는 방식으로 우리를 에덴의 들판에서 뛰어놀게 해주리라. 인공 없는 자연 속에 있는 '기분'으로…….

서동욱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벨기에 루뱅대학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상의 모험-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 <차이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등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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