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시안 |
여기,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가는 세월에 기대어 무언가를 마냥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무더운 여름, 두 아이를 사산하고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는 중전. 왕의 여자가 된 귀인과 그녀를 사랑하는 중전의 오라버니 한자겸. 노기에 떨며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왕과 권력을 쟁취하려는 대비의 음모까지, 이는 모두 식상하리만치 통속적 이야기다. 그러나 작품에는 이 '당연함'을 '새롭게', 또 '아름답게' 포장하는 무언가가 있다. 독특한 무대와 살아있는 연주, 그리고 무대 위에 있는 모두가 전하는 진정성이 밤의 호숫가에 비치는 달처럼 환하고 아련하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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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약간 높은 사각형의 무대를 중심으로 배우들이 둘러앉아있다. 단아하고 깨끗한 무대는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 아무것도 없기에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세상의 전부인 삶과 사랑, 죽음을 자유자재로 연주한다. 공연 내내 무대를 떠나지 않는 배우들은 새벽을 알리는 닭이 되기도 하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가 되기도 한다. 바람소리를 내고 귀뚜라미 울음을 전한다. 바람과 비, 동물과 자연, 모든 것이 살아있다. 의상 역시 살아있다. 독사의 가죽을 연상시키는 왕의 의상은 몸을 휘감고 먹이를 찾는 것처럼 어둡고 위협적이다. 독사의 유혹으로 피를 보고 말겠다는 대비의 붉은 의상, 그리고 한없이 슬픈 여인들의 바람인 듯 가벼운 의상이 흰 바탕 위에 다양한 선을 긋는다. 점차 늘어나는 선들이 흰 무대를 질서 있게 채운다. 이 죽고 살고 사랑하는 무대를 지탱하는 음악 또한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 연극 '호야'는 쁘띠-오케스트라를 구성, 건반과 퍼커션은 물론 바이올린, 첼로, 기타, 플롯 등 다채로운 악기 편성으로 인물의 테마를 강화했다. 사각형의 '사건' 안에서 움직이는 배우들과 사각형 밖에 앉아있는 배우들부터 악기까지 모두가 매 순간 연기를 하고 있다. 80분 동안의 그 촘촘한 밀도가 관객의 마음을 빈틈없이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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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호야'가 가진 가장 큰 외형적 특징은 배우들이 지문과 해설을 읽는 것이다. 이는 무대 위의 캐릭터들만 알고 암묵적인 합의하에 이뤄지는 속삭임이자 표시다. 관객들은 알 필요가 없는 것들. 그러나 연극 '호야'의 배우들은 이 지문을 친절하게 읽어준다. 그 친절함이 조금은 낯설다. 웃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난감하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극에 몰입되는 것은 순식간, 오히려 지문을 읽는 왕의 표정이 비통하고 중전의 눈물이 구체화된다. 이 새로운 실험은 극이 끝나기도 전에 성공했음을 알린다. 연극다운 시도가 연극을 더욱 연극답게 만든 것이다.
통속적인 이야기와 낯선 시도를 감동으로 이끌어낸 데는 똑똑한 연출과 풍성한 연기가 있다. 또한 저마다의 아픔을 갖고 있는 캐릭터들의 현실이 이 시대를 사는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왕의 여자, 그것이 왕의 성은인가 자비를 가장한 농락인가. 욕심이 사라져 부처가 되려나보다는 중전의 한숨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한 여인에게 내려진 저주인가. 왕의 자리는 권력의 상징인가 모든 짊을 어깨에 메야하는 운명의 장난인가. 연극 '호야'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 정을 나누고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꽃밭을 거닐어 보는 것, 아프면 울고 좋으면 웃고 화나면 소리치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어보는 것. 연극 '호야'는 사람처럼 사는 것을 그리워했던 궁궐 여인들의 소리 없는 울음으로 채워져 있다. 한恨조차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사랑에 관객들은 충분히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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