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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진실을 감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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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진실을 감추다

위원회 활동 소개 영문 책자,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배포 금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안팎에서 때 아닌 금서(禁書) 논란이 불거졌다. 안병욱 전 위원장 시절에 발간돼 이미 1200여 부가 배포된 <Truth and Reconciliation(진실과 화해)>라는 영문 책자를, 지난달 1일 취임한 이영조 위원장이 배포하지 못하게 하면서다.

지난 3년 동안의 위원회 활동을 정리한 이 책자가 갑작스레 배포 금지된 이유에 대해 진실화해위 측은 영문 번역의 오류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당장 번역자들부터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명예 훼손'을 이유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영어권 국가 언론도 이 책자의 영어 표현에서 문제될 만한 부분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진실화해위 측은 추가적인 해명을 거부했다.

한나라당 공천 신청자 출신 위원장의 금서 조치

이 책자가 배포 금지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래서다. 신임 이영조 위원장의 이념 성향 때문이라는 것.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출신인 이 위원장은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사무총장, (사)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지난 2004년 17대 총선 당시 경기 성남분당갑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 공천을 신청했다가 떨어졌다. 지난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상임위원으로 발을 들인 것도 한나라당 지명을 통해서였다.

이런 이력 외에도 이 위원장의 이념 성향이 드러난 대목은 많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19일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노태우 정권 시절은 '권위주의 통치' 시기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혀 논란을 낳았다. 역시 이 위원장의 성향이 강하게 반영된 입장이다.

▲ <Truth and Reconciliation> 표지. ⓒ프레시안
이런 입장을 지닌 이 위원장이 국군이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을 표지로 삼은 책자를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는 설명이 나온다.

안병욱 전임 위원장이 쓴 도입글 때문이라는 설명도 나온다. 안 전 위원장은 "한국 과거사 해결의 역사적 배경(Historical Background of Korea's Past Settlement)"이라는 글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친일파 등용, 일본 군국주의 세력 및 미국 군대로부터 전수받은 통치 기술 활용 등이 그 이유다. 또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 우익 테러 단체 등이 저지른 양민 학살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이런 내용이 이 이 위원장의 이념 성향에 거슬렸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어권 언론 "배포금지 책자, 영어 번역 문제 없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 위원장 개인의 이념 성향 때문에 이미 발간된 책자의 배포가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는 것. '표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가 훼손됐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우려는 이 책자가 독자로 삼았던 외국에서 이미 나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언론인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지난 23일 "한국에서 위험에 빠진 진실(Truth in danger in South Korea)"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신문의 아시아 태평양 담당 에디터인 하미쉬 맥도날드가 쓴 글이다. 자유주의 성향의 역사학자(liberal-minded history professor)인 전임 위원장이 물러나고 새 위원장이 들어서면서, 진실화해위 활동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언론인이 보기에 '번역 오류' 때문에 책자를 배포했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필자인 하미쉬 맥도날드는 이 글에서 "이 책자를 읽고 나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자는 영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자의 영어는 분명하고 올바르다(A reading of the contested document makes it clear that the English is not the problem: it is quite clear and correct)"라고 적었다.

▲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 ⓒ연합뉴스
실제로 이 위원장은 진실화해위 상임위원 시절 이 책자 발간 작업에 참여했다. 이 위원장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어 실력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자의 영어 표현에 문제가 있다면, 번역 오류를 찾아내 고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위원장이 되고서야 갑자기 책자를 배포 중지했다.

이런 결정이 이뤄진 '진짜 이유'를 물었지만, 진실화해위 측은 "궁금한 게 많겠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대답을 반복했다. 책자에서 어떤 부분이 '번역 오류'에 해당하는지, 만약 '번역 오류'만이 문제라면 책자에 실린 글의 기조에 대해 위원장이 동의한다는 것인지, '번역 오류'가 있고 그게 바로잡힌다면 책자를 다시 배포할 것인지, 위원장은 왜 상임위원 시절에는 '번역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이 없었다.

번역자들 "난데 없는 번역 오류 주장, 소송으로 맞설 것"

갑작스런 배포 금지 결정이 낳은 또 다른 피해자는 이 책자의 번역자들이다. 번역자들은 "책자가 나와서 전 세계로 배포되는 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가 갑자기 번역 오류를 들먹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실제로 번역자들 가운데 한 명은 책자가 나온 뒤인 지난해 10월에도 진실화해위가 주최한 국제심포지엄에서 통번역을 맡았었다. 이미 낸 책자를 뒤늦게 배포 금지해야 할 만큼, 문제가 있는 번역을 한 번역자라면 이런 일도 맡기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단지 불쾌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번역이 생업인 이들에게는 일자리가 걸린 문제다. 번역자 이름이 공개된 책자를 놓고, 번역을 맡긴 측이 뒤늦게 공개적으로 번역 오류를 주장한다면 번역자들이 펄쩍 뛰는 게 당연하다. 번역자들은 현재 진실화해위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부당한 의도로 '번역 오류'라는 허위 사실을 주장해 번역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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