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옛사람도 요즘처럼 우유를 마셨을까? 아니다. 생우유의 음용은 없었다. <농정전서>를 보면 그들이 우유를 어떻게 먹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요약하면 이렇다. 소에서 짠 젖, 즉 '우유'를 일단 끓여서 농축한다. 이것을 냉각해 걸러서 생락(酪)을 만들고, 다시 건락을 만든다. 이 건락을 물에 타서 먹었다. 여기서 '낙'은 오늘날의 치즈와 비슷했다.
그렇다면, 젖소가 아닌 소에서 어떻게 우유를 얻었을까? <임원십육지>는 이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송아지가 빨아서 얻는 양보다 많은 양을 얻으려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새끼를 낳자마자 곡물이 든 죽을 먹인 암소를 사흘 정도 후에 네 발을 묶고 뒤집는다. 소의 꼭지를 쥐어 짠 다음, 유방을 발로 여러 차례 찬다.
생각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 암소의 젖줄이 터졌다. 이런 작업을 거치고서야 한우에서 우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젖 짜는 일은 3월부터 9월까지 목초가 풍성할 때만 가능했다. 다른 때에는 암소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젖을 얻더라도 그 질이 낮았다.
▲ 옛사람에게 우유의 효능은 신비 그 자체였다. ⓒ프레시안 |
우유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는 영조의 교서를 봐도 알 수 있다. 영조는 우유를 먹을 수 있는 자격까지 분명히 규정했다. 영조는 "예전에는 대전, 대비전, 세자궁 이외에는 낙죽을 들이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동궁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며 왕손에게도 우유를 금지하라고 명했다. 이 유우소가 폐지된 것은 조선 말 철종 때였다.
우유를 먹는 사람을 이렇게 엄격히 제한했던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우에서 우유를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아지가 먹을 것을 빼앗아 이용하다 보니 늘 양은 부족했다. 한편, 유우소의 규모를 축소한 성종 등은 농업의 위축을 우려했다.
그러나 태종, 세종 등 왕들은 유(낙죽)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들은 우유가 신비한 효과를 내리라 믿었다. 한의학은 우유의 효능을 다양하게 설명한다. 우선 우유는 원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진액을 만들어 장의 활동을 돕는다. 당연히 당뇨, 변비 등의 질환에 효과가 있다. 특히 마늘과 함께 서너 차례 끓여서 먹으면 몸의 냉기, 쇠약을 없앤다.
가끔 우유를 소화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보통 두유를 찾곤 하는데, 마늘과 함께 우유를 끓여서 마시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겠다. 단, 우유가 맞지 않는 이들이 있다. 배가 차고, 설사가 잦거나, 구토가 잦은 사람은 복용하지 말아야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사람이 우유를 복용할 경우 배 안에 딱딱한 경물을 만든다고 경고한다.
우유에 관한 옛 기록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도 남아시아의 물소가 들어온 기록이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연나라에 말, 곰을 선물로 보내자 물소로 화답했다. 고려 때도 송나라 상인이 물소 두 마리를 왕에게 바친 일이 있었다. 조선 세조 때는 오키나와의 물소를 비원에서 기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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