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90년대에 20대를 보낸 영화팬들이라면 에이미 헤커링 감독이 연출한 <클루리스>가 일으킨 작은 소동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미국 비벌리 힐즈의 철없는 상류층 아가씨들을 등장시킨 흔한 10대용 로맨틱 코미디쯤으로 보였던 <클루리스>는 국내에서도 그저 몇 개의 극장에서 짧은 기간 간판을 거는 것으로 상영이 끝났다. 그러나 이후 여느 걸작 로맨틱 코미디가 다 그렇듯 비디오와 DVD로 길디 긴 수명을 이어가게 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엠마]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이 영화는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의 외양 위에 '제인 오스틴 소설의 영화화'라는 가능성을 가장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실험한 선구자적 영화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각색도 훌륭했지만 이후 10년이 넘도록 영화계에 불었던 '제인 오스틴 열풍'을 끌어낸 일등공신 격인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브리태니 머피는 <클루리스>에서 시골뜨기 전학생 출신으로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로 변신하는 타이 역을 맡아 주목을 받는다.
<클루리스>에서 인형처럼 예쁜 외모로 화려한 패션감각을 선보일 수 있었던 알리시아 실버스톤과 달리, 브리태니 머피가 맡았던 타이 역은 캐릭터 자체가 '아무리 꾸며도 촌스러움과 노동계급스러움을 벗어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영화의 외적인 플롯 역시 셰어가 결국 이복오빠인 조쉬에게서 진짜 사랑을 찾게 되는 로맨스를 다루는 만큼, '주인공의 미운오리 새끼 친구'인 타이는 그저 예쁜 여주인공에게 계기로 작용하는 기능적인 캐릭터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브리태니 머피는 애초 감독의 의도에 걸맞게 가장 현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평범한 10대의 시선을 완성해낸다. 다소 건들거리는 걸음에 'F 단어'를 습관처럼 사용하고 섹스를 밝히며, 긴장을 할 때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며 안절부절 못 하는 타이야말로 <클루리스>의 인물 중에서 일반적인 관객들과 가장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캐릭터였다. 알리시아 실버스톤이 자신의 참사랑을 깨닫는 씬보다도 그녀가 알리시아 실버스톤과 말싸움을 벌이며 폭발하는 씬이 영화의 클래이맥스 씬으로 느껴지게 만들 정도다. 결국 이 영화에서 브리태니가 연기한 타이는 원작소설 혹은 (충실한 각색물인) 귀네스 펠트로 주연의 <엠마>에서의 원래 캐릭터인 해리엇 스미스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에이미 헤커링의 시선을 그대로 구현하는 인물이 됐다.
▲ <클루리스>에 출연한 브리태니 머피의 아직 앳된 모습. 머피는 주인공인 셰어(알리시아 실버스톤)에게 '간택'돼 시골 촌뜨기 전학생에서 세련된 도시 사립학교의 퀸카로 거듭나지만 결국 자신의 본모습과 취향을 찾아가는 타이 역을 맡았다. |
하지만 이후의 브리태니 머피의 필모그래피가 비약적인 변화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 TV에서 활동했고, 간혹 소품에서 주연을 맡기는 했지만 영화에서는 대체로 조연 자리를 전전했다. 사실 77년생인 브리태니 머피는 13살 때부터 텔레비전 CF와 드라마에 얼굴을 내밀었던 만큼, 영화보다는 TV에서 더 친근한 아역배우 출신이었다. 거기에 작은 몸에 동안이어서 더 그랬을까, <클루리스>에서 주목을 받은 후 20대 중반이 되도록 오랫동안 10대 소녀의 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드롭 데드 고저스>(1999)나 <처음 만나는 자유>(1999), <라이딩 위드 보이즈>(2001) 등에서는 커스틴 던스트나 위노나 라이더, 안젤리나 졸리, 혹은 드류 베리모어 옆을 보좌하는 데에 불과했다. 주연을 맡았던 <잭과 레바>나 <체리 폴스>도 그리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앨런 루돌프 감독의 <트릭시>나 마이클 더글라스가 주연을 맡았던 <돈 세이 워드> 등에서도 성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그녀는 영원히 소녀일 것처럼 보였다.
이 배우가 다시 한 번 널리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에미넴과 함께 공연했던 <8마일>(2002)에서다. <8마일>에서 그녀가 맡은 알렉스는 비록 에미넴이 연기한 지미의 '배신한 여자친구' 정도의 작은 역이었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는 눈부시게 빛이 났다.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서 있던 그녀는 밑바닥의 절망적인 삶을 살던 지미에게 잠시 다가온 눈부신 태양이며 오아시스였고, 작고 가녀려서 더욱 진흙탕에 핀 장미 꽃봉오리 같았다. 비록 그 빛나던 태양이, 눈부신 장미 꽃봉오리가 머지않아 싸구려 가짜 전구불 혹은 플라스틱 꽃송이였음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8마일>을 계기로 그녀는 비로소 진지한 성인 연기자로 대접을 받게 된다. 이른 나이에 인생을 모두 알아버린 듯한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서 있는 그녀의 이미지는, 이후 그녀가 가진 이미지의 밑바탕을 이루게 된다.
▲ <8마일>에 출연할 당시 브리태니 머피의 모습. 그녀는 여기서 에미넴의 상대역인 알렉스 역으로 줄연했다. |
그러나 이듬해에 출연한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가 성공하면서, 브리태니 머피는 소품 로맨틱 코미디의 히로인으로 고정돼 버린다. 애쉬튼 커처와 함께 출연했던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는 2003년 1월에 개봉해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으며, 브리태니 머피에게는 흥행성공과 함께 '남자친구 애쉬튼 커처'를 함께 선사한 영화가 됐다. 신혼여행 중인 부부의 티격태격을 다룬 이 영화에서 브리태니 머피는 철없는 남편과 유치하게 싸움을 계속하는, 철없지만 사랑스러운 사라 역으로 그녀의 코미디 재능을 마음껏 펼친다. 비록 영화는 혹평 세례를 받았고 그녀는 그해 골든라즈베리에서 최악의 여우조연 부문과 외악의 커플 부문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8마일>에서 보여준 이미지의 바탕 위에 '철없고 변덕스럽지만 사랑스럽고, 억척스럽지만 귀여운' 색깔과 약간의 불안정함을 씌운 이미지는 이후 브리태니 머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이후 이어진 영화들 역시 이런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아쉽게도 <업타운 걸>이나 <리틀 블랙 북> 같은 영화들은 비디오 로맨틱코미디 팬들에게는 어필했을지 몰라도 작품적으로도, 흥행적으로도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 <씬 시티>에서 그녀는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후 <씬 시티>를 뒤이을 작품을 내놓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
브리태니 머피에게 또 다른 전기가 되어줬던 작품은 프랭크 밀러와 로베르토 로드리게즈가 공동감독한 <씬 시티>(2005)였다. 비록 그녀는 여기에서도 제시카 알바나 로사리오 도슨, 심지어 알렉시스 블레델 같은 어린 여배우들한테도 밀린 채 조연의 신세였지만, 클라이브 오언이 베네시오 델 토로를 응징하는 데에 그녀만큼 충분한 이유가 될 만한 존재가 또 있었을까? 닳고 닳은 노련함과 여전히 '어린 소녀'의 가녀린 미숙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이제껏 만들어온 이미지를 또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한없이 철없고 귀엽기만 한 이미지를 벗어나는 듯도 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는 여전히 예전의 소품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다시 지지부진한 필모그래피가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안타깝게 생을 맺었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세 편의 영화가 내년 개봉 예정이긴 하지만, 그 영화들 역시 그녀의 대표작을 바꾸지는 못할 공산이 크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연출, 주연을 맡고 제이슨 스태덤과 이연걸이 함께 출연을 하는 <익스펜더블>에서도 그녀의 비중은 여전히 작다.) 그녀의 대표작은 여전히 <클루리스>와 <8마일>, 그리고 <씬 시티> 정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 애쉬튼 커처는 브리태니 머피의 사망 소식에 "오늘 세상은 햇살의 작은 한 조각을 잃었다"며 자신의 트위터에 애도를 표했다. 눈부신 태양 그 자체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녀가 분명 '작은 햇살 조각'이었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스스로 남을 즐겁게 해주는 '집시 여행자'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말하곤 했던 그녀는 그렇게 짧은 햇빛 조각을 세상에 던지고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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