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경찰은 이재현 회장이 1987년 고(故)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삼성화재 주식 9만여주를 증여받아 1994~1998년 CJ그룹이 삼성그룹으로 계열분리될 때 순차적으로 처분한 것으로 봤다.
하지만 지난 20일 법원(서울고법 형사4부)이 확보한 진술에 따르면 이재현 회장은 차명재산 관련 세금만 1700억 원을 납부했다. 차명재산이 최소 수천억 원 규모에 달했던 것이다.
▲범 삼성가의 맏형 격인 삼성그룹의 주인은 이건희 전 그룹 회장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비자금을 차명계좌로 관리했는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김용철 변호사, 경제개혁연대 등 이 회장의 자금내역을 정조준하는 이들은 수십 조 원 규모의 비자금을 운용할 것으로 추측한다. ⓒ뉴시스 |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동안 숨겨져 온 범 삼성가(家)의 재산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당장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이뤄진 지난 삼성특검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삼성생명 관련 차명재산이 밝혀지면서 삼성생명의 최대주주가 이건희 회장으로 바뀌기도 했다.
'부실 투성이' 지적을 받은 특검 조사만으로도 삼성그룹이 운용한 비자금은 4조5000억 원 대였다. 당시 삼성그룹은 이 재산 전부가 이병철 회장의 상속재산이라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거짓이었다. 차명재산의 핵심을 구성했던 삼성생명 주식의 상당부분은 이병철 회장 사후인 지난 1988년 9월 삼성생명 유상증자 당시 주주였던 신세계와 제일제당(현 CJ)의 실권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연대가 한국신용평가정보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당시 유상증자는 이랬다. 신세계와 제일제당은 지난 1984년 말부터 1987년 말까지 각각 29.0%와 23.0%의 삼성생명 지분을 갖고 있었다. 즉, 이병철 회장이 사망한 이후인 1987년 말 당시 이들 두 법인이 갖고 있던 지분만 52.0%에 달했던 셈이다. 주주명의가 확인되지 않은 지분, 즉 차명재산일 가능성이 높은 부분은 48.0%에 불과했다.
이들 두 계열사의 지분율은 1988년부터 절반(신세계 29.0%→14.5%, 제일제당 23.0%→11.5%)으로 감소했다. 두 주주가 1988년 9월 삼성생명 유상증자(자본금 30억 원에서 60억 원으로 증자) 과정에서 실권했기 때문이다. 실권으로 발생한 지분이 26.0%였다.
그런데 삼성특검 결과 확인된 삼성그룹 임직원 명의의 지분은 51.8%다. 신세계와 제일제당의 보유지분 26.0%와 임직원 지분 51.8%를 제외한 나머지 22.2%는 확인 결과 이건희 전 회장(10.0%)과 삼성문화재단(5.0%), 삼성에버랜드(2.2%), 고 이종기 전 삼성화재 대표(5.0%)가 보유했다.
이들 두 그룹이 실권한 것으로 알려진 지분 26.0%와 삼성특검 결과 나온 차명지분 22.2%의 차이인 3.8%의 행방이 설명되지 않는 셈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들 오차를 바탕으로 "최소 3.8%, 최대 26.0%(실권주 모두가 임직원들에게 차명으로 인수됐다고 가정할 때)의 차명지분은 이병철 회장 사후인 1988년 9월 삼성생명 유상증자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판단했다. 김 변호사와 경제개혁연대는 "삼성그룹이 운용한 차명재산은 수십조 원대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차명계좌 관리의 신세계
신세계 역시 차명재산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2006년 8월, 참여연대는 "국세청이 신세계그룹 총수 일가가 대규모 주식을 차명으로 보유해온 사실을 포착하고 세금추징 절차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당시 신세계는 "사실무근"이라며 관련 사실을 부인했으나 의혹이 제기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정재은 명예회장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던 지분 7000억 원 어치를 두 자녀(정용진, 정유경)에게 증여했다.
보다 구체적인 문제제기가 추가로 이뤄졌다. 한 해 넘긴 2007년 10월 22일, 심상정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은 국세청 국정감사에서 관련 세금추징 과세 과정서 국세청이 차명계좌를 발견했음에도 증여세를 시가가 아닌 액면가로 평가해 고작 2억여 원만 과세했을 뿐 아니라, 검찰에 고발하지도 않았던 사실을 따져물었다.
당시 심 의원은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명의신탁된 주식(차명주식)에 대한 증여세를 얼마 추징했느냐. 신세계그룹 규모를 볼 때 추징 세금은 수백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신세계그룹을 이어받을 정용진 부회장. 참여연대, 심상정 전 의원 등은 이명희 명예회장이 아들에게 줄 재산을 차명으로 관리했다고 추정한다. ⓒ뉴시스 |
지난 1988년 5월, 삼성 측은 이병철 회장의 상속재산이 237억 원이라고 밝히고 이에 대해 150억 원의 상속세를 신고했다. 당시 삼성은 "재산추적팀까지 가동해 국내는 물론, 일본 재산까지 모두 찾아서 신고했다"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국세청도 이를 거들었다. 국세청은 "7개월 간의 조사를 거쳐 경기도 용인의 잣나무, 서울 이태원 주택의 정원석 등 누락재산 36억 원을 더 찾아내 세금 26억 원을 더 매겼다"고 자랑했다. 당시 주요 언론은 삼성의 당당한 모습과 국세청의 활약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범 삼성 가의 막강한 로비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삼성그룹의 사회 전방위에 걸친 로비는 안기부 X파일 사건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등으로 수면 위로 일부나마 드러났다. 김 변호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삼성그룹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로비 대상은 바로 국세청"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결과는 이미 알려진 대로다. 'X파일' 사태를 고발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정치인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했고 김 변호사는 '파렴치한' '배신자'의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겼다. 김 변호사는 국세청·검찰은 물론이고 사법부·언론·정치인 등이 모두 삼성가의 로비대상임을 확인한 바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각각 수천억 원 내지 수조 원에 이르는 범 삼성가의 차명재산이 모두 선대 회장의 상속재산이라는 변명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며 "상속재산 이외에도 새로운 비자금이 조성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수사당국은 차명자금 조성은 물론, 세금 탈루 혐의에 대해서도 수사해 적법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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