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88만 원 세대로 불리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인턴도 알바도 비정규직도 아닌, 번듯한 자기만의 직업이 아닐까? 일할 공간을 갖지 못한, 아니 일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우리 시대의 슬픈 젊은이들의 자화상!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 태반이 백수이거나 취업 재수생, 삼수생이 되어가고 있다. 자기만의 일터를 제공받지 못한 우리 시대,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최소한의 나만의 작업 공간, 나만의 방을 꿈꿀 자유는 있지 않을까?
<자기만의 방>(이미애 옮김, 민음사 펴냄)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델러웨이 부인>의 작가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몇 년 전 비록 별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디 아워스(The Hours)>라는 영화에서 울프가 소개되기도 했었다. 이 영화에서 울프의 음울하고 창백한 심경이, 복잡한 여성으로 분장한 니콜 키드먼의 끈끈한 생명력 있는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는 선하다.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 비평의 정전(正典)으로 알려져 있다.
몇 년 전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중견 여성 작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녀는 오랜 동안 집에서 소설을 틈틈이 써 왔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다 집을 나간 후에 홀로 남겨진 공간에서 창작의 시간을 겨우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집 안에서 식구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독립된 방인 자기만의 작업실을 갖게 된 것은 50이 넘은 나이였다고 한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집 근처에 작업 공간을 따로 두고 출근하듯이 작업실에 와서 글을 쓰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허드렛일을 하곤 하는데, 이러한 일은 최근 들어서 일인 듯싶다.
인문학을 직업으로 삼는 우리 연구자들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강의와 연구 작업을 병행해야 하는 비정규직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자기만의 작업 공간은 절실하다. 더군다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갖기 어렵고, 연구와 가사 노동이 한데 얽혀 있는 여성 연구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외부로부터 쏟아지는 간섭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작업 공간에서 과연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작업이 이뤄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늘 내 머리 속을 꽉 채우고 있다.
다락방에서 막연히 전업 작가나 연구자를 꿈꾸던 청소년기의 낭만의 공간을 생활의 공간에서 실현시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기만의 방'을 상상력의 상징의 낭만적인 공간으로부터 현실화시켜 실존적이고 실질적인 물질적인 토대로서의 공간으로 마련하기란 결코 수월하지 않다. 특히 창의적인 작업을 위해 자기만의 독립된 방을 갖지 못한 이 땅의 수많은 여성들에게 울프가 말하는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은 왜 필요한 것일까?
역사 속에서 배제된 여성의 이야기
▲ 버지니아 울프. ⓒ프레시안 |
알파걸이 출현했다고 해서 이 땅의 많은 여성들이 다 알파걸이 된 것이 아니며, 알파걸의 존재로 이 사회의 약자이자 소수자인 여성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된 것도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도 그 시대에 알파걸, 잘나가는 엘리트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의 알파걸로서의 인식보다는 차별받은 여성의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울프는 역사 속에서 여성들의 물질적인 토대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 물질적 조건이 의식을 결정한다는 거창한 마르크스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경제적인 궁핍은 우리의 의식을 막다른 골목으로 모는 것은 분명하다. 울프는 "왜 남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가? 무슨 이유로 남성은 그렇게 부유하고 여성은 그다지도 가난한가? 가난은 픽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데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가?"라고 묻는다.
울프는 진정한 자유를 위해 필요한 것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 관념적인 자유의 공기가 아님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다. 여성은 그저 200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울프가 중산층의 엘리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빈곤한 여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피상적인 비판일 수 있다.
여성들은 역사 속에서 늘 배제되어 되어, 역사는 그의 이야기(history : his-story)일 뿐이며, 그녀의 이야기(her-story)는 기록하지 않았다, 실제로 익명의 많은 여성들이 역사 속에서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여성에게 침묵과 익명을 강요하는 히스테리 증상을 보여 왔다. 그래서 울프는 "나폴레옹의 생애를 150번째 쓴다든가 키츠에 대한 연구를 70 번째로 한다든가, 늙은 Z교수와 그 부류들이 지금 쓰고 있는, 밀턴의 어순 도치를 키츠가 이용했다는 등의 글을 쓰느니, 차라리 그녀의 진정한 역사를 쓸 것"을 강조한다.
유명한 남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남성의 잣대로 그려진 여성의 모습에 대해 여성 작가들이 여성의 눈과 여성의 가치로 여성을 그리려고 한 사람들로 울프는 <오만과 편견>의 작가인 제인 오스틴과 <폭풍의 언덕>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를 들고 있다. 이들은 남성적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가부장제 사회의 한가운데서 그녀들이 본 그대로의 사물을 고집하여 보고 쓰는 대단한 재능과 성실성의 소유자였다. 즉 그녀들은 남성처럼 쓰지 않고 여성이 쓰듯이 썼다. 그 당시 소설을 썼던 수천 명의 여성들 가운데 그들만이 영원한 현학자들의 끊임없는 충고를 완전히 무시했던 것이다.
가부장제 속 여성적 글쓰기란?
"여자가 감히 글을 쓴다고?"라는 남성들의 비웃음을 오늘날에는 웃고 넘길 일이지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머리인 이성과 가슴인 감정을 갖고 글을 쓰는 일이 16세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여성이 존재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편견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별 이견 없이 받여 들여져 근대 르네상스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16세기의 남성들은 "슬프게도! 펜을 드는 여성은 / 주제넘은 동물이라 간주되어 / 어떤 미덕으로도 그 결함은 구제될 수 없다네"라고 말하는 데 별 주저함이 없었다.
이러한 전통이 비단 문학의 분야에만 한정된 것이겠는가. 서양 근대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에서 평등한 시민 교육이 이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철학, 신학, 과학 등 보편 학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마녀 사냥으로 화형을 당했을지라도 자신이 누군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끓어오르는 여성들의 글쓰기 열정을 누구도 막지 못했다.
가부장제가 정착된 이래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여성 작가는 그리스의 여류 시인 사포이다. 여성과 노예가 남성 귀족들처럼 인간 대접을 받기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사포가 역사에 기록되고 시인이 되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만큼 사포의 글 쓰기 작업은 여성의 자의식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가부장제 이래로 여성들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역사 속에서 누구도 여성들에게 자신이 누군지에 대한 자의식을 갖기를,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반추해 보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글 쓰는 여성들에게 세상이 던지는 시선은 차가운 무관심을 넘어서, 감당하기 어려운 적대감이다. "키츠와 플로베르와 그 밖의 천재적인 남성들이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이었다. 세상은 남자들에게 말하듯이, '네가 원한다면 써라. 내게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라고 말하지만, 여성들에게는 '글을 쓴다고? 네가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고 말한다."라고 울프는 적고 있다. 세상이 나를 밀어내는 듯한 참담한 경험은 현대 여성들에게도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는 비극적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정신적으로 늘 불안하고 분열적인 양상을 보여 왔으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울프의 불안정한 모습은 여성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누가 여성을 이렇게 사분오열된 존재로 만들었는가? 흔히 남성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글을 쓰는데 반해, 여성은 감정에 치우쳐 글을 쓰기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남성들의 차가운 이성적 글쓰기만이 진정 사물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 준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진실한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분열과 고통으로 얼룩진 여성들의 체험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이 여성으로 하여금,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기를 응시할 것을 촉구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고 불안정하고 고통스런 여성의 삶이 그 원동력이자 창조력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여성의 창조력은 남성의 창조력과 전적으로 다르며, 여성의 창조력은 몇 세기에 걸쳐 더없이 고통스러운 훈련에 의해 얻어졌고,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다고 말한 울프의 토로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여성에게 절실한 나만의 공간
문학사에서 셰익스피어나 괴테에 필적할 만한 여성 작가는 왜 등장하지 않았던 것일까? 여성들의 머리와 능력이 남성들보다 훨씬 열등하고 부족했기 때문인가? 셰익스피어와 괴테가 대문호라는 것은 어떤 기준에서 누가 평가한 것일까? 울프는 매우 흥미로운 가정을 한다. 만일 셰익스피어의 누이 주디스가 살아 있었더라면 셰익스피어에 필적할 만한 문필가가 되지 않았을까?
이러한 흥미로운 울프의 상상력은 차디찬 현실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어떤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는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노예처럼 사는 여성들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누이, 주디스는 그저 상상의 인물로 그치고 말 뿐이다.
여성들이 자신을 찾고자 글을 쓰기 위한 몸부림은 격려되기 보다는 오히려 끊임없는 방해 공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세기 중산층 여성들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그리 먼 옛날처럼 들리지만 않은 것은 왜일까?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 환경이 현재 우리 여성들의 작업 환경과 오버랩되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제인 오스틴의 조카가 쓴 회상록을 보기로 하자. "어떻게 숙모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숙모님에게는 종종 찾아갈 만한 독립된 서재가 없었고, 또 숙모님이 쓴 작품의 대부분은 공동의 거실에서 온갖 종류의 일상적인 방해를 받으며 쓰여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비정규직의 많은 여성들, 여성 작가들, 여성 연구자들은 자기만의 직업과 작업실을 갖지 못한 채, 30여 분 정도의 집중된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간섭과 일상의 잡다한 일들 속에서 거의 분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성은 문명의 타고난 계승자가 아니라, 문명의 변두리에 서 있는 이질적이고 비판적인 존재로 배치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명과 역사의 변두리에 서 있는 여성들은 남성들보다도 더 자신을 한 발짝 물러서서 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게 되었다. 여성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자기만의 방은 문명의 중심에 있는 화려하고 세련된 작업실보다 초라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자기만의 방은 여성 특유의 고통과 분열의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어두운 사각지대를 비출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할 수 있다.
자기만의 방을 확보하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더 어려운 우리 시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끊임없이 진화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기만의 방은 나를 가두어 놓는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무한한 상상력의 잠재적인 공간이 될 것이며, 창조적인 삶의 원동력을 길어 낼 수 있는 절실한 실존의 공간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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