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해 오던 일일 인권신문 〈인권하루소식〉이 28일 3000호를 끝으로 12년 6개월의 역사를 마무리했다.
지난 1993년 9월 7일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아나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르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슬퍼"한다는 글로 첫발을 내디뎠던 인권하루소식은 그간 단 하루도 결호를 내지 않았다.
***지난 1993년 9월, 팩스를 윤전기 삼아 출범한 〈인권하루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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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창간의 초심으로 새 매체를 만들 것을 다짐하며'라는 마감 인사에서 인권운동사랑방은 "이른바 문민정부의 개혁놀음에 취해 '안보'와 '질서'의 이름 아래 인권이 광범위하게 유린되고 있는 사회를 보지 못하던 그 시절에 우리는 마침 보급 중이던 팩스를 윤전기 삼아 초라하게 〈인권하루소식〉을 창간했다"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새겼다.
이들은 "불면의 밤을 지새워 우리는 팩스에서 PC통신으로, 인터넷 이메일로, 우편으로 부지런히 하루소식을 전달하기를 3천 번, 우리는 창간사에서 밝힌 것처럼 "가마 메는" 고단함을 인권운동의 고단함으로 여겨 왔고, 다행히도 마감하는 오늘까지 우리는 단 하루의 결호도 내지 않았음에 위안을 삼는다"며 스스로를 치하했다.
〈박스〉시작
"우리는 참다운 자유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며, 진실을 찾기 위해 본질을 파헤침에도 두려움이 없다. 뜨거운 연대와 애정은 우리의 용기를 북돋을 것이며, 날카로운 비판은 우리의 필봉을 더욱 날선 칼날로 만들 것이다. 우리는 '시린 칼날'로 인권유린의 현장을 가차 없이 내리칠 것이다." - 1993년 9월 7일 〈인권하루소식〉 창간사 중에서
〈박스〉끝
"과연 우리는 참다운 자유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치열했던가. 인권유린의 현장을 가차 없이 내리칠 수 있도록 칼날을 시리게 벼려 왔던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 이들은 "인권소식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될 수 있었고, 하루소식의 기사를 언론사들이 취재원으로 삼았으며, 무수한 특종을 냈다는 그 영광 뒤에서 우리는 변화된 인권의 환경을 마주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민주화는 자유를 가져 왔지만, 평등 없는 자유는 기만임을 확인하는 이때, 말기 자본주의의 광포한 바람이 민중들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평화는 늘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때에 우리는 다시 창간의 정신으로 되돌아가 우리의 설 자리를 지난한 논의 과정을 통해 찾아 왔다"며 "오는 4월 새로운 매체로 찾아올 것을 12년 6개월, 3천호를 발행했던 〈인권하루소식〉의 역사적 소임을 마감하는 인사로 대신한다"고 밝혔다.
***"심도 깊은 인권소식으로 오는 4월에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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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인권하루소식〉의 가장 열렬한 애독자는 이 신문의 비판 대상이었던 검찰과 경찰, 법무부와 안기부 같은 권력기관과 자신들의 수고를 떠넘긴 언론사 기자들이였다.
일반 매체에서 소외된 인권사각지대를 발로 누비며 만든 〈인권하루소식〉은 민주언론상, 민주시민언론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터넷 환경의 발달로 매체가 늘어나고 속보경쟁이 격화되면서 인권하루소식도 경쟁에 노출, 지난 2005년 2월 1일 부터는 인터넷신문의 형태로 발간되기도 했다.
서준식, 박래군 활동가 등에 이어 인권하루소식의 마지막 편집장을 맡았던 강성준 활동가는 "폐간이라는 말 대신 마침이라는 말을 쓰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는 "미디어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기존의 인권하루소식에서 해 왔던 역할이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며 "다른 매체에서 다루지 않았던 기사들을 다루려 했으나 이미 속도감 있게 인권소식을 전하는 대형 매체들이 많아진 상황에서 인권하루소식은 다른 매체로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종간 이유를 설명했다.
강 활동가는 "(국민들이) 기타 매체를 통해 발 빠르게 인권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있지만 그에 반해 어떤 사건이 인권이고 권리인지 오히려 제대로 보기 힘든 상황"이라며 "새로 발행된 매체에서는 단순한 사건보도만이 아니라 보다 심도 깊은 인권소식을 담아 오는 4월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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