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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적'은 진짜 '적'이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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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적'은 진짜 '적'이 맞습니까?"

[철학자의 서재] 다비드 칼리의 <적>

우리들의 전투 지침서

철학을 공부하는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 한 일은 아이를 낳은 일이지 싶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너무 어렵지만 말이다. 오히려 아이가 어릴 적에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몸이 피곤한 것 정도라 할까. 그러나 아이가 커 갈수록 아이를 통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정신의 노고(勞苦)'를 하게 된다. 나는 세상 사람들을 위선 없이 대하고 있는가, 나의 가치관은 정말 온전한가 하는 반성이다. 특히 아이에게 책을 읽히며 나도 모르게 속물화되고 있는 나 자신을 추스른다.

아이가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어 동화책을 읽히게 되었을 때 그 동화책이 아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진리는 생각지도 못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진리는 바로 아이의 말 속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눈 속에 부처가 있고, 아이의 질문 속에 철학의 근본 물음들이 있었다.

▲ <적>(다비드 칼리 지음, 세르주 블로크 그림, 안수연 옮김, 문학동네 펴냄). ⓒ프레시안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어린 왕자> 바로 옆에 두기로 한 동화책은 다비드 칼리의 <적>(세르주 블로크 그림, 안수연 옮김, 문학동네 펴냄)이다. <적>은 전쟁 중에 사막 같은 곳에 고립된 어느 병사의 이야기이다. 이 병사는 참호 속에 홀로 숨어 있다. 그리고 저편에 적군의 참호가 마주하고 있다. '나'도 혼자고 적도 혼자이다. 둘 다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둘은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상부의 아무런 지시가 없는데도, 둘은 적대하고 있다.

둘의 적대 근거는 전투 지침서이다. 전투 지침서에는 적이 왜 적인가가 나와 있다. '적은 인간이 아니다. 아무 이유 없이 여자와 어린 아이를 죽였고, 그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고, 적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서 우리를 죽이고 가족도 죽일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숨어 들어간 적의 참호에서 적이 갖고 있던 전투 지침서를 읽게 된다.

적 또한 '나'를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적대시하고 있었다. 적의 지침서에도 '그는 인간이 아니다. 적은 아무 이유 없이 여자와 어린 아이를 죽였다'고 적혀 있는 것이었다. 적의 적은 곧 '나'인데, '나'는 여자와 어린 아이를 죽이지 않았는데 적은 '나'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에게도 가족 사진이 있고 돌아가고픈 고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하며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 버젓한 인간이었다는 것이 이 동화가 들려주고자 한 이야기이다.

시인 고은은 <우주의 사투리>에서 "인류사는 전쟁사이기도 하다. 인간 혹은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평화보다 훨씬 많은 전쟁이 있어야 했다.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의 그늘진 골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그가 1998년의 '국제평화대회'에서 한 강연 원고, '예술은 평화를 지지한다' 중 일부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는 전쟁, 그리고 지금은 잠자고 있지만 우리 한반도에서 여전히 스멀거리고 있는 긴장. 이 부단한 전쟁이 다름 아니라 서로를 인간이 아니라고 본 탓에 이처럼 끝날 줄 모르고 있다면, 참호 속에서 떨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나는 이 동화를 읽으며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렸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에서 언급한 개념이다. 이는 아렌트가 잡지사 기자로 일할 때 1960년에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서 본 것에 대한 기록이다. 이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 중 한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명령받은 대로, 의무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며 오히려 '만일 명령대로 안 했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보며 아렌트는 극단적인 악인이 따로 있어서 악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근면하고 평범한 인간이 '시대적 범죄에 동참한 것', 즉 '시대적 악을 아무런 사유나 비판 없이 추종한 것'이 곧 '악의 평범성'이라고 비판했다. 아이히만이 이렇게 된 것은 '아무 생각 없음(thoughtlessness)' 탓이라고 아렌트는 진단한다.

비판적 사고 능력을 잃어버리면 누구라도 이렇게 될 수 있다.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려는 태도가 없이 전쟁 지침서만을 따랐던 <적> 속의 병사는 전쟁 지침서에 그려진 '악 자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적'의 존재를 믿었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하고 보니 그런 악인으로서의 적은 없었고, 그저 '나'와 같은 평범한 존재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악 그 자체로 알고 있던 자는 평범한 '나'를 악 그 자체로 알고 서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런 비극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곧 허상을 벗고 실상에 다가가려는 비판적 사고이다.

참호에서 벗어나기

그 다음 우리는 전투 지침서를 누가 썼을까 하는 관심을 가져 보아야 할 것이다. 적의 전투 지침서와 '나'의 전투 지침서가 같다. 그 동일한 전투 지침서를 누가 썼을까? 나는 이 동화책이 구체적인 전쟁과 구체적인 병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과 우리들 일상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을 만난다. 그리고 타인 속에서 산다. 우리는 이 타인을 친구이기보다는 적으로 생각한다.

적을 뜻하는 'enemy'는 어원상 'en'과 'emy'를 합한 말이다. 'en'은 무엇을 부정하는 뜻이고 'emy'는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친구가 아닌 자'가 곧 적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진정한 친구나 우정을 지키기 어렵고 오히려 '프레너미(frenemy)'와 같은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있다. '친구(friend)'와 '적(enemy)'을 합성한 말로 '친구인 척하나 알고 보면 적인 자'를 뜻한다. 일상에서 마주친 타인에 대해 전략적으로 행위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구분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 중에는 의사소통적 행위와 전략적 행위가 있다. 가령 등산에서 만난 사람의 '힘드시죠?'라는 인사의 의도가 힘든 산행에 대해 공감을 나누는 데 있고 그 표현으로 건넨 인사라면, 이 인사 행위는 의사소통적 행위이다. 반면 '힘드시죠?'라는 인사 뒤에 뭔가를 팔려고 한다든가 하는 다른 숨은 의도가 있을 때, 이 인사 행위는 전략적 행위이다. 우리는 전략적 행위로 가득 찬 세상을 살고 있다. 전략적 행위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타인의 숨은 의도는 간파하고, 나의 숨은 의도는 교묘히 숨기면서 나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전술, 즉 '처세술'은 초미의 관심사로 되어 있다.

다시 물음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가슴에 품은 전투 지침서는 누가 건네 주었을까? 그것을 건넨 자는 어떤 권력자나 어떤 특정한 기관이 아니다. 바로 팍팍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상 명령 자체이다. 나의 전략적 행위의 대상이 되는 타인은 내가 딛고 서야 할 수단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내 수단으로 대면한 상대방을 나와 똑같은 사람, 나의 친구로 생각한다면 나는 그를 도저히 수단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 내 안에서 '적'이 제조된다. '그는 나와 다르고, 그는 다르기 때문에 싫고, 그는 싫기 때문에 악하다. 그는 악하기 때문에 무자비하며, 무자비한 그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일련의 추론은 다비드 칼리의 <적> 속에 적혀 있는 전투 지침서를 그대로 닮아 있다.

내가 이렇게 추론하고 있는 사이 뉴스 보도가 울린다. '엘리베이터 성 추행, 테러, 신종 플루 창궐…….' 뉴스가 귀에 들릴 때마다 길에서 마주친 타인은 내게 추행을 할 수 있고 테러를 가할 수 있고 병을 옮길 수 있는 적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에서 '우리 시대의 열린 사회에 깃든 가장 사악한 악령은 공포'라고 말한다. '그 공포를 낳고 기르는 것은 현대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으로서 공포는 '우리가 통제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무력감'으로 인해 증폭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면 그가 말하는 사태가 쉽게 공감된다.

"상대가 혹 배신할까 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더 넓은 친구와 동지 관계의 네트워크 형성에 급급해 한다. 저마다 휴대폰의 주소록에 갈수록 더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려 하기에 새 휴대폰 모델이 나올 때마다 전보다 커진 주소록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저마다 배신에 대비해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으로 리스크를 줄이려 하는데, 그것은 결국 리스크를 키우며 배신을 평범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바우만의 진단에 따르면 '유동적 공포'의 근원은 우리의 기술 문명과 전지구화된 자본주의이다. 우리의 기술 문명과 전지구화된 자본주의는 불확정성과 통제 불능성을 키운다. 그리고 이것은 공포를 낳는다. 바우만이 여기에 '유동적(liquid)'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이 공포가 액체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곳곳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유동적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이 하는 선택은 바로 '배신의 평범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적'이 되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전략적 행위로 가득찬 세상에서 의사소통적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하버마스의 철학은 '동화(fairy tale)'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말 그대로의 동화를 통해 결국 진리는 어린이의 눈 속에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하고 싶다. 유동적이기 때문에 더 공포스러운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리라. <적>에서 참호 속에 숨어 있던 병사가 적의 참호로 숨어 들어가 그도 나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둘은 적대 관계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참호 바깥으로 무장해제하고 나온다면 어쩌면 우리의 문명은 조금 덜 발전할지도 모르고 우리의 부(富)는 조금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우리는 불안을 벗어 던지고 아이처럼 해맑게 어깨동무할 수 있다.

나의 아이들은 <적>을 읽고 재밌다고 했다. 이 동화가 왜 재밌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적이 적이 아닌 게 좋다고 한다. 그리곤 우리도 북한 사람들을 괴물로 생각했지 않았냐고 한다. 그런데 새터민을 보니 우리랑 똑같더라며 웃는다. 그리곤 전쟁은 나쁘고 사람은 서로 같은데 왜 이라크에 파병을 했고 왜 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하는 거냐고 묻는다. 나는 '그러게 말이다'라고 답한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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