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한 머리를 고무줄로 묶는 한 여자의 뒷모습. 발을 겨우 끌듯 걷는 그녀의 걸음은 느리고 위태롭다. 약간 비틀대듯 걸어가던 그녀의 앞모습을 카메라가 비추자, 무릎까지 내려올 듯 무거운 눈가의 다크서클과 터진 입술이 눈에 띈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얼굴과 몸 전체를 가득 짓누르고 있는 피로감과 무기력감만 봐도, 그녀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정신병원의 간호사인 그녀, 수경(이보영)이 새로이 맞게 된 환자는 부스스한 머리와 역시 터진 입술을 한 조만수(현빈)이다. 가족친지가 아무도 없어 마을 이장의 손에 이끌려온 그는 의사와의 첫 면담에서, 종이를 꺼내 볼펜으로 '자기가 발행한' 수표를 써주며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도박빚에 미친 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다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환자다. 영화는 이때부터 병원에서 생활하는 만수의 사연과 정신과 수간호사인 수경의 사연을 교차한다. 만수의 사연은 명백히 입원하기 전 있었던 '과거'의 일이지만, 수경의 사연은 현재진행형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너무나 큰 고통을 받았거나 받고 있으며, 그 사연이란 특정한 개인에게만 일어나거나 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흔한 보는 희귀하고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익히 듣고 보았음직한 흔하고 일상적인 사연이라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자식도 못 알아보고 어쩌다 집밖을 나가면 길을 헤매기 일쑤다. 정비소를 함께 운영하던 건실한 형은 도박에 미친 후 돈을 내놓으라며, 그리고 이제는 정비소 계약문서를 내놓으라며 만수를 괴롭힌다. 심지어 한밤중에 만수의 목을 조르기까지 한다. 서울에 올라간 뒤 연락이 끊긴 연인은 어느 날 그를 찾아와 새 사람을 만났다며 이별을 고한다. 수경의 사연도 다를 바 없다. 암 말기인 홀아버지 때문에 재산을 모두 날린 그녀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면 아버지의 병실에서 간병을 하며 만성적인 피로와 불면증에 시달린다. 몰래 데이트하던 같은 병동 의사는 그녀를 멀리하고 새 연애를 하면서 그녀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나날이 쌓여만 가는 빚독촉 고지서와 전화 역시 잠시도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흔하고도 익숙한 사건들과 고통들.
▲ <나는 행복합니다> |
그와 그녀가 착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은 배가 된다. 만수는 목을 조르는 형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노래방에서조차 큰소리를 내지 못한 채 겨우 뒷모습만 보이며 어깨만 가늘게 들썩인다. 수경은 한번쯤 도달할 곳 없는 원망 한 번 입밖에 내놓을 법한데도, 마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가 마지막 희망이기라도 한 듯 아버지의 병간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하고, 착한 사람들은 같은 불행이라도 착하지 못한 우리들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는다. 만수가 병원에 와서야 (가짜라고는 해도) 비로소 행복을 찾았듯, 어쩌면 지금 만수의 저 미쳐버린 모습은 수경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시간차를 두고 고통을 겪었던/겪고 있는 두 남녀는 비록 환자와 간호사의 관계지만, 서로의 고통을 '인지'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지적 관계다. 과대망상 속에서 행복을 찾은 만수는 고통에 대한 위로를 다른 환자가 아닌 '간호사'인 수경에게 건넴으로써 수경을 환자의 커뮤니티 안으로 끌어들인다. 수경은 특별히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를 파기하지는 않지만, 다른 환자한테와는 다소 다른 톤으로 만수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그들은 환자와 간호사 이상의 관계로 다가서진 않으며, 특별히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희미한 연대의 순간, 혹은 찰나의 고통의 접점. 그 드물고 귀한 순간, 그들은 상대에게 '당신의 고통을 감지했다'는 희미한 싸인만을 보낼 뿐이다.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주기엔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자신의 짐의 무게가 너무나도 크다. 그 희미한 순간이 과연 그들에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지독한 고통 속에서 과연 '행복'의 순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이 영화가 진정으로 다루는 것은 '고통'이다. 주인공들의 지독한 불행과 고통은, 현실의 갑남을녀가 겪는 일반적인 불행들과 너무 닮아있다. 그런 현실을 직접 겪거나 간접적으로 주변에서 노상 보고듣는 관객들의 입장에선 선뜻 이들의 불행과 행복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들어서기가 힘들다. 실제로는 매우 화사한 외모를 갖고 있는 두 배우가 단순히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추레한 옷차림을 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으며 어디에도 구원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영화의 엔딩에서도 예정된 것이다.
이청준의 원작소설이 끔찍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 에피소드를 생략한 채 '완치되어 퇴원한' 만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오토바이에 달린 희미한 헤드라이트가 간신히 비추는 어두컴컴한 밤길,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다. 수경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수경은 비로소 병원(그가 근무하는 곳과 간병을 하던 곳, 둘 다)을 벗어나 혼자만의 여행을 간다. 그러나 그렇게 절박하게 수경을 땅 위로, 맨정신으로 붙잡아매던 아버지가 죽은 뒤 홀로남은 그 삶을, 과연 그녀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영화의 보도자료는 그 엔딩이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끝도 없이 이어진, 오토바이의 가느다란 헤드라이트만 켜진 그 어둡고 긴 길을 보며 희망을 느낄 관객들이 얼마나 있을까. 수경과 만수에게 놓인 앞으로의 삶의 시간을 예고하는 그 길엔 여분의 빛도 동반자도 없다. 원작의 드라마틱한 엔딩이 거세된 채 남은 영화의 엔딩은, 오히려 너무 끔찍하게 현실을 닮아있다. 너무 끔찍해서 도저히 불행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는, 차라리 지독한 역설로서의 행복을 말하며 그 불행을 눈앞에 정면으로 들이미는 이 영화, 참으로 지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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