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독창적인' 반문이 아니었다. 1994년 11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에게 혼외 딸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 '파리 마치'라는 주간지에 대해 '르몽드'가 내뱉은 반문이었다. 현직 대통령의 혼외 딸 사실을 보도한 특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은 보호돼야 한다는 가치에 입각해 던진 반문이었다.
'조선일보'는 이런 '르몽드'의 반문을 디딤돌 삼아 질타했다. "한국에서도 공직자의 사생활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며 이런 최소한의 합의가 '하수구 저널리즘'에 의해 깨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로선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 경향신문 기사 캡쳐 |
이제 다른 데로 눈을 돌리자. '조선일보'의 일갈을 디딤돌 삼아 비슷한 사례를 살펴보자.
대서특필한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불륜 보도를 쏟아낸다. 흥분한(또는 신난) 미국 언론 보도를 인용해 국제면, 나아가 종합면 주요 기사로 처리한다. 타이거 우즈가 불륜 사실을 시인했으며 세 번째 내연녀가 등장했다고 중계방송을 한다. '하수구 저널리즘'을 성토한 '조선일보'가 예외가 아니고, 이른바 '진보언론'이 예외가 아니다. 방송의 '막장드라마'를 성토하던 신문이 예외가 아니고, 신문의 '선정성'을 역비판하던 방송이 예외가 아니다.
뭐라고 합리화할까? 미국 언론이 대서특필하니까? 어림없다. 한국 언론은 미국 언론의 자매지가 아니다. 타이거 우즈의 위상 때문에? 이 또한 어림없다. 타이거 우즈의 위상이 아무리 높기로서니 주요 선진국 현직 대통령의 위상에 버금갈까.
▲ 조선일보 기사 캡쳐 |
하나 더 있다. '안전성'이다. 당사자가 바다 건너 다른 땅에 살고 있으니까 탈 날 여지가 없다. 자기 나라에서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타이거 우즈가 머나먼 이국땅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언론의 보도까지 문제 삼지는 못할 테니까 맘껏 써도, 그렇게 맘껏 '장사'에 활용해도 명예훼손소송에 휘말리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뒤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만개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수구'에서 대박의 꽃을 피우고 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라는 '르몽드'의 반문에 "장사가 되잖아!"로 응수하면서 타이거 우즈를 '지름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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