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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의경'의 고백, "후회는 없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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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촛불 의경'의 고백, "후회는 없다. 하지만…"

[인터뷰] 촛불 진압 거부했던 의경 이길준 씨

그것은 용기였다. 옳지 않다고 생각한 일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는 한 순간에 그의 삶을 바꿨다.

이길준(25) 씨. 그는 '촛불 의경'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2008년 7월,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의무경찰로 복무 중이던 그는, 촛불 집회를 폭력으로 진압할 수 없다며 휴가를 나와서 복귀를 거부했다. 양심선언이자, 양심적 병역 거부였다. (☞관련 기사 : "그때 하얗게 타 버렸다. 내 안의 인간성이…")

당시 1주일간 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자진 출두한 그는 병역 거부, 명령 불복종, 명예 훼손 등의 혐의로 고발을 당했고, 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지난달 30일, 이길준 씨는 6개월 감형과 가석방 결정을 받아 1년 3개월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출소 하루 뒤인 지난 1일, 홍익대 앞 한 클럽에서 그를 환영하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행사장에서 만난 그는, 의경 시절 짧은 머리가 아니어서인지 1년 전과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그의 내면에도 변화가 있었을까?

▲ 지난해 현역 의경으로서 촛불 집회 진압을 거부하고 양심선언을 했던 이길준 씨가 6개월 감형과 가석방 결정을 받아 지난달 30일 1년 3개월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프레시안

"삶을 통해 양심선언과 촛불의 의미 실천하고 싶다"

"붕 떠 있는 기분이다. 생각보다 바깥에 나와 적응을 잘 하고 있긴 한데, 그래도 아직 실감이 나진 않는다."

감형, 가석방 결정으로 예상보다 일찍 출소한 그는 "정확한 사유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통상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1년 3개월을 지내고 가석방으로 출소한 것에 맞춰 기간을 조정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모범적' 생활을 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그냥 얌전히 있었을 뿐"이라며 "물론 감옥이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겐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감옥 이전 이미 전·의경 생활을 했던 터였다. 그때와 비교하면 어땠을까? 그는 "부대 안에 있으면 출동을 나가는 등 일이 많았다"며 "감옥 안에서도 작업을 하긴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많이 있어서 인생의 전기가 될 수 있었다"고 싱긋 웃었다. 무슨 생각을 했냐고 재차 물었다.

"시기별로 달랐다. 일단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된다. 갇혀 있다는 환경 자체가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또 출소 뒤에 질문을 받으면 어떤 답을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 어떤 질문과 답을 생각했나?

"일단, 앞으로 감옥에서 나가게 되면 삶으로서 내가 했던 행동, 촛불 집회의 의미를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대만 할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로만 끝나면 공허해지니까.

개인은 사회적 경쟁 체제라는 관념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거기에 순응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삶을 보여주는 것, 서로 죽고 죽이지 않아도 되다는 것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연대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함몰되지 않아야 한다"

그가 부대 복귀를 거부하고 양심선언을 했던 지난해 7월은 촛불 집회의 열기가 이어지던 때였다. 끝을 모르고 이어질 것 같던 촛불 행렬은 계절이 바뀌면서 서서히 사그라졌다. 결국 미국산 쇠고기는 예정대로 수입됐고, 시민들은 더 이상 거리로 모이지 않았다.

그의 행동 역시 당시에는 화제를 낳았지만 이제는 거론되지 않는다.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진 않을까? 이길준 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촛불 집회와 관련한 저의 행동도 그렇고, 어떤 개인이든 사회든 모두 다면적으로 구성되지 한쪽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촛불 집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촛불 집회를 단일한 사건으로 볼 게 아니라 거기에 참여했던 개개인을 봐야 한다. 물론 지금 예전처럼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참여했던 개인의 삶은 지속되고 있다. 그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또 그것이 모여 어떤 사회를 구성할지가 중요하다.

연대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개인이 함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촛불 역시 개인의 삶이 만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반MB'라는 의제에 묻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촛불로 상징된 움직임이 획일적인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또 에너지가 있다면 도로만이 아닌 언제 어디에서라도 분출될 수 있다고 본다."

이길준 씨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한국 사회에서는 쉴새없이 다양한 일이 터졌다. 촛불 집회는 계속되지 않았지만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됐다. 그 역시 감옥에서 꾸준히 사회 소식을 접하며 특히 용산 참사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그 참사가 우리 사회에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며 "출소하고 바로 참사 현장으로 가려 했지만, 아직 못 가고 있다. 빠른 시일 내에 꼭 들를 것"이라고 말했다.

"격려해준 시민, 손 잡아준 선임 모두 고마웠다"

▲ "촛불 역시 개인의 삶이 만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이길준 씨가 양심선언을 하고 농성을 벌인 곳은 서울 양천구 신월동 성당이었다. 당시 성당에는 농성 기간 내내 수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그를 격려하고 응원했다. 매일 저녁 성당에서 촛불 집회가 벌어지는가 하면, 동호회나 개인이 수백 명분의 먹을거리를 준비해 오는 등 격려가 쇄도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응원 편지가 많이 왔다"며 "모든 분들이 다 의지가 됐다. 정말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 특히 인상이 깊었던 응원이 있었나.

"수감 초기에 받았던 편지 가운데에 '세밀하고 촘촘한 기획보다 중요한 건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튀는 것'이라는 구절이었다. 많은 위로를 받았고, 수감 생활 중에도 계속 생각났다."

- 부모님이 양심선언 당시 많이 속상해하셨다.

"두 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저를 믿어주신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아들이 감옥도 가고 하니까 걱정되셨을 것이다. 그 사이 많이 늙으셨더라. 안타깝다."

- 고발 사유에는 부대 내에서 구타가 있었다고 언론에 밝힌 것을 두고 사실이 아니라며 경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같이 생활했던 의경들과는 어떻게 지내나.

"연락은 안 하고 있다. 그러나 구타했던 상사들도 인간적으로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개인에게 불만은 없다.

재판 과정에서 잠시 강제 복귀를 당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제 주변에 접근하거나 말을 걸 수 없었다. 감시조 세 명이 계속 붙어다니기도 했다. 그때 잠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한 선임이 지나가면서 가만히 옆에서 잠시 손을 잡아주고 갔다. 참 고마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발랄한 혁명을 하고 싶다"

그가 양심선언을 한 뒤 더 이상 그런 선언은 나오지 않았다. 당시 그는 자신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다른 전·의경들도 양심선언을 이어가달라고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개인이 병역을 거부했을 때 감내해야 할 부분이 크니까.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 순 없다"며 "개인이 용기없게 만드는 구조를 계속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저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길을 텄다고 생각한다. 다른 전·의경은 물론 누구라도 용기가 필요한 상황에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이길준 씨는 내년 3월, 대학에 3학년으로 복학한다. 그는 "빨리 졸업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며 "글쓰기, 음악 등 각자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껏 끼를 펼치면서 사회 참여를 하는 문화 운동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수감 생활은 진로를 생각하는데 전환점이 됐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용기를 못 냈는데, 감옥에서 '하고 싶은 일은 하면서 살아야겠다'란 생각을 했다. 갇혀있다 보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느꼈다."

사실 그의 전공은 국어국문학이다. 감옥 안, 열악한 상황에서도 글 쓰는 게 너무 좋아서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는 앞으로도 '글쓰기'를 계속 할 생각이라고 했다. 감옥 안에서 완성한 소설도 있지만 아직 공개는 못한다고도 했다.

재소자들이 감옥에서 많이 하는 일 중에는 '독서'가 있다. 그 역시 "살면서 제일 많이 책을 읽었던 기간"이라고 회상하며 가장 인상깊었던 책으로 <가난뱅이의 역습>(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이루 펴냄)을 꼽았다. '찌개 집회', '냄새 테러' 등 유쾌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일본에서 '사회 운동'을 하고 있는 저자의 경험담을 엮은 책이다. (☞관련 기사 : "별 볼일 없이 삽니다…하지만 할 말은 많아요", "재미있게! 가난뱅이들끼리 놀아봅시다")

"발랄한 혁명을 좋아한다. 사회 문제도 암울하고 몸도 갇혀 있다보니 기분이 가라앉기 쉬운데 그 책을 보면서 발랄한 기운을 많이 얻었다. 또 그런 기운이 사회에 많이 전파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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