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좌절감 이 무렵이 되면 공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국로(國老)'라는 이름으로 떠받듦을 받고 있었지만, 나라의 정치나 권력자들의 행동을 좌우할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이름일 뿐이었다. 기원전 481년에 있었던 애공 접견이 이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해 여름에 제나라 대신 진항이 자기네 임금의 계승 문제를 일으킨 바 있었다. 임금 간공(簡公)을 자기가 장악한 지역으로 끌고 갔다가 결국 죽여 버린 것이었다. 진항이 처음 해보는 짓도 아니었다. 몇 해 전 간공의 아버지 도공(悼公)도 같은 식으로 진항의 손에 죽었었다. 이제 진항은 간공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려는 참이었다. <좌전>의 기록은 이렇다. 갑오일에 제나라 진항이 서주에서 제 임금 간공을 죽였다. 공자는 3일간 목욕재계한 다음 (애공을 찾아가) 제나라 정벌을 청했다. 세 번 청하자 임금이 말했다. "노나라는 제나라 때문에 쇠약해진 지 오래인데, 그대 말대로 제나라를 정벌한다면 어떻게 감당을 할 것인가?" 공자가 대답했다. "진항이 임금을 시역했는데, 그를 미워하는 백성이 절반입니다. 노나라의 힘에 제나라의 힘 절반을 더한다면 이길 것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그대가 계손씨에게 말하라." 공자가 사례하고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 (좌전 애14 甲午 齊陳恆弒其君壬于舒州 孔丘三日齊 而請伐齊 三 公曰 魯為齊弱久矣 子之伐之 將若之何 對曰 陳恆弒其君 民之不與者半 以魯之眾 加齊之半 可克也 公曰 子告季孫 孔子辭 退而告人曰 吾以從大夫之後也 故不敢不言) <논어>에 보면 공자는 임금이 시킨 대로 3대 가문을 찾아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공자의 생각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제안이 거부된 후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니 감히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논어 14-21 之三子 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애공의 태도는 회피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제나라에서 벌어진 잘못된 일을 응징하기 위해 정벌에 나서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고 실제적으로도 바람직한 일이라는 공자의 설득을 설령 애공이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군대와 무기를 모두 3대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공자에게 한 말은 "그대가 계손씨에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상황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대한 깊은 무력감을 보여주는 말이다. 아무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임금은 자기 처지를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공자로 말하자면 임금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3대 가문을 찾아갔을 것이다. 공자는 정치적 책임감과 예법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세상이 아무리 편의에 따라 돌아간다 하더라도 몇 가지 원칙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금을 뵙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할 것.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성심으로 호소할 것. 아무리 결과가 뻔한 일이라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도록 간청하는 데 그는 성심을 다했다. -안핑 친(Annping Chin)의 <공자 평전(The Authentic Confucius)>(돌베개 근간) 중에서. |
공자가 71세 때의 일이다. 공자는 54세 때 조국인 노나라의 관직을 그만두고 14년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이 일이 있기 3년 전에 귀국했다. 원로 대신(國老)으로 숭앙받기는 했지만 실권은 없는 입장이었다.
실권은 임금(제후)에게도 없었다. 세습 가문들의 힘이 임금의 권세를 압도하는 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여러 나라에 공통된 현상이었다. 이웃 제나라에서 진항이 임금을 멋대로 죽이고 갈아치운 것은 그중 두드러진 일이었지만, 노나라에서도 재정과 군사를 비롯한 모든 권세를 계손씨를 필두로 하는 3대 가문이(통상 '3환'三桓이라 칭함) 과점하고 있었고 임금을 모욕하는 일이 예사로 있었다. 애공의 할아버지 소공이 모욕을 참지 못하고 계손씨를 토벌하러 나섰다가 역습을 당해 나라 밖으로 도망친 이래 노나라 임금은 숨을 죽이고 살아왔다. 애공 자신도 이 일이 있은 지 13년 후에 나라 밖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공자는 나라의 주권이 임금의 손에 쥐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임금의 권력은 공변된 것이어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운용되는 것인데, 이것을 신하들이 탈취하고 있으면 그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행사되기 쉽다고 본 것이었다.
이웃 제나라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무도한 짓이 벌어졌을 때 이를 응징하러 출병해야 한다고 그가 주장한 데는 제나라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보다 노나라 자체의 질서를 세우는 기회로 삼으려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능멸하는 짓은 누구에게라도 공격받을 죄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힘없는 임금이 자기 건의를 받아들여줄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힘은 있지만 진항과 동류인 노나라 실력자들이 자기 건의를 받아들여줄 리 없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해결은 못 해도, 그래도 문제가 있다는 말은 해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2005년 여름, 대연정 제안으로 궁지에 몰린 노무현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은 좀 접어놓고 가능한 일에만 치중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건의에 보인 반응이었다고 유시민 씨가 전하는 말이다. (<노무현, 한국 정치 이의 있습니다> 4쪽) 이 말에 접하며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공자의 말이 겹쳐져 떠올랐다.
▲ "유시민 씨 권유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에만 치중했다면 재임 중 몇 가지 좋은 업적을 더 내놓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장 이뤄지지 않는 일이라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 "말은 해놓아야" 하겠다는 성심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프레시안 |
문제의 초점은 정치의 공변됨, 즉 공공성에 있다. 국민 또는 백성 대다수의 복리를 보장함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지키는 데 목적을 두는 정치의 운용이 노 대통령이나 공자나 함께 바란 것이다. 소수의 무절제한 욕망을 채우는 데 정치가 이용되어 국가 구조가 위험해지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반대했다.
그런데 공자의 시대에는 임금이 힘을 잃고 있었다. 주나라 왕인 천자는 하늘에게 책임을 지고 각국의 임금, 즉 제후들은 천자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봉건제의 원리였다. 그런데 각국의 권력자들은 임금에게 명목상 책임을 지는 입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임금을 능멸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책임지는 일 없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권력자들이 아무 견제 없이 사익에 몰두하는 사회는 군주제건 공화제건 망하게 되어 있다.
당시 권력자들은 국제적 네트워크까지 형성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권력 투쟁에 밀린 권력자가 다른 나라로 달아나면 그 나라 권력자가 융숭하게 대접하고 심지어 함께 국제적인 사업을 도모하는 풍조까지 있었다. 요즘의 재산 해외 도피보다 더 효과적인 신분 보장이었다. 그러니 권력을 휘두르는 데 조심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동류 의식을 가진 외국의 권력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신경만 쓰면 되는 것이었다. 자기 나라는 망해도 상관없었다.
우리 사회의 주권자, 국민들은 노나라 애공보다 권력을 잘 지키고 있는 걸까?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검찰과 경찰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를 봐도 그렇고, 주권 행사의 기반 조건을 위협하는 미디어 법의 강행 과정을 봐도 그렇다. 무엇보다, "관습 헌법"이란 이름으로 국민들이 만들지도 않은 헌법을 제멋대로 만들어 휘두르는 헌법재판소의 행태를 볼 때 그렇다.
일부 헌법재판관들에게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잘못한 일이 있었는가?" 물었을 때 너무 지나친 표현 아니냐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이완용은 팔아먹을 것으로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고 그들이 팔아먹을 것으로는 헌법이 있었기 때문에 헌법을 팔아먹은 것뿐이지, 맡겨놓은 것을 뭐든지 팔아먹으려는 배짱은 똑같은 것이라고.
이완용은 나라 없어도 자기와 주변 사람들은 잘 살 길이 있다고 생각해서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었다. 이 사회에 위험을 가져오더라도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도 너무 많고, 또 그 사람들이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길 모르고 이 사회 잘 되기만을 바라는 국민들이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데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쌓여 있다.
공자는 자기 시대 권력자들에게 성심을 다해 호소했다. 질서가 무너져도 자기네는 끄떡없으리라는 그들의 믿음이 헛된 환상임을 설득하려 애썼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알리지 않을 수 없다"며 자기 역할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현실에서 통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접어놓지 않은 그 정성이 공자를 위대한 교육자로 만들었다. 당장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힘을 집중하고 권력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적당히 처신했다면 행정가로서 실적은 더 올렸을지 몰라도 오래 가는 가르침을 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다. 유시민 씨 권유대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에만 치중했다면 재임 중 몇 가지 좋은 업적을 더 내놓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장 이뤄지지 않는 일이라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 "말은 해놓아야" 하겠다는 성심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분의 업적보다 그분의 가르침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