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삶의 조건은 자연 환경이다. 인간인 이상 지구상에 생존하려면 지구의 자연·환경적 제약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인류가 지구에 생존할 수 있는 시간, 즉 인류의 역사적 시간 동안에는 이 명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와 함께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급속히 녹아내리고 있으며 이에 따라 조만간 지구 환경의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위험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우리는 이 위험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생태·환경의 파괴가 우리에게 가져올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필연적으로 대재앙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지질학적 시간 범위에 입각해 생각해 보면 지구에 비해 실로 무력한 존재다. 온실 효과로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려도 지구는 번영할지 모르며 이 문제를 지질학적 시간을 통해 해결할 것이지만, 무역항과 항만처럼 인류가 해수면 높이에 지은 주요 도시들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고 농업 패턴의 변화는 인류를 뿌리에서부터 흔들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지구의 죽음을 선언하는 세기말적 종말론과 구별해야 한다. 우리의 생태·환경의 위기는 인류의 거주지인 지구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인 '인류의 시간' 범위에서 언급되는 것이지 지질학적 시간 규모에서 바라본 지구의 소멸이나 생태계의 소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가 행한 지구의 급속한 변형이 인간 사회와 인간 종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이 문제는 '지질학적 시간' 범위에서 사고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거주지인 지구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인류의 시간' 범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심층 생태주의는 인간이 다른 종에 비해 특별히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이 견해는 인류가 하나의 종으로서 지구에서 보내는 순간이 파괴되더라도 거의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과 같다. 우리는 영성적 생태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시간은 인류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의 운명과 인류의 운명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생태·환경 위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인간 중심주의에 기반을 둬야 한다.
뛰어난 과학자들에 따르면 지금 일어나는 변화의 속도, 규모, 종류, 복합성은 역사상 그 어떤 시대와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구를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생태 위기의 규모에 인류는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생태학
▲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추선영 옮김, 책갈피 펴냄). ⓒ프레시안 |
이 책의 주제는 자본주의와 생태학은 서로 대립한다는 것이다. 생태학과 자본주의가 대립한다는 관점은 현재의 전 지구적 생태 위기의 원인을 인간의 탐욕적 본성에서 찾거나 근대성, 산업주의 또는 경제 발전 등에 돌리는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생태 위기에 대한 저자의 접근법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 환경과 지속 가능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생태학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길이야말로 인류의 진보라는 전망을 포기하지 않고도 환경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포스터는 말한다.
자본주의는 영원히 존속 가능한 체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역사적 시간 안에서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전 세계를 상대로 요구하는 경제 성장은 다량의 물질과 에너지를 처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역사적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인간과 지구, 사회와 자연의 신진대사 관계를 손상시키고 악화시켜 왔다. 역사적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장벽과 부딪혀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인간이 자연적 필연의 영역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를 눈먼 권력이 지배하도록 만들지 않고 합리적 방식으로 집합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의 건설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 조건이다.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본주의
세계 자본주의 체계의 중심부 국가들에서는 혁명적인 사회 생태적 접근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환경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들은 인간을 착취하는 전 세계 체제를 유지해 왔듯이 지구의 자원도 약탈해 왔다. 이 같은 자본주의가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생태 문제가 실로 얼마나 갈등을 빚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늘날 가장 시급한 지구적 환경 문제로 여겨지는 지구 온난화 문제에 주목해 보자. 지구 온난화는 이산화탄소와 그 밖의 온실가스들이 방출되면서 대기 내에 열을 가둬 발생하는 온실효과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현재의 지구 온난화 경향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금세기 내에 지구적 규모의 생태적·사회적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는 예측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된 과학적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을 일반화하면, 생태학과 자본주의는 양립 불가능하다. 그 이유의 단면을 우리는 온실가스 배출의 의무적 감소를 규정하고 있는 교토의정서가 실패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1990년 수준보다 약 5퍼센트 낮추는 것을 목표로 했던 교토의정서는 지구 온난화를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세계 기후 과학자들이 되풀이해 온 온실가스 배출량의 대폭 축소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우 교토의정서 원년 1990년 수준 또는 그 이하로 배출량을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미국 정부와 미국 자본이 표면상 내세운 것과는 달리 반대한 진짜 이유는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미국 경제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데 있었다.
미국이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를 거부한 것은 미국 기업과 정부의 특수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고유한 조건을 반영한 것이다. 탄소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경제 성장에 따라 화석연료 수요도 증가한다. 화석연료에 대한 높은 수요는 높은 이윤을 낳기 때문에 장려된다. 자본은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구조화하도록 유도한다. 탄소 기반 경제는 선진 자본주의의 풍토병이다.
기술 개발을 통해 에너지 효율성을 증대하는 것도 해결의 열쇠가 아니다. 기술 개발을 통한 에너지 효율성 증대만으로는 화석연료의 수요 증가를 억제할 수 없다. 높은 이윤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는 한, 에너지 효율성 증대로 인해 단위 에너지 비용 감소 그 자체가 생산의 양을 늘리기 위해 화석연료 에너지 수요를 증가시키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안에는 경제 성장과 환경 파괴의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동학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
레이첼 카슨이 말했듯이 근대 자본주의 세계는 속도와 양(量)의 신, 그리고 간단하고 신속한 이윤의 신을 숭배한다. 이윤과 생산의 신에게 충실하게 봉사하는 자들은 현재의 전 지구적 환경 파괴를 야기한 바로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문제의 해결책으로 받아들이라고 권유한다.
이들은 현대 문명의 생태·사회적 위기의 깊이와 지속 가능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생산의 급진적 재조직화 요구를 무시해 왔다. 기업가들은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고 환경적으로 온화한 존재라고 포장하고 있으며 기업의 영향 하에 있는 과학도 위험관리 분석 같은 기법을 동원해 방어할 수 없는 것을 방어하고 있다.
경제 환원주의의 모순과 한계
이윤과 생산의 신에 봉사하는 환경경제학자들도 환경 문제에 큰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자연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환경을 시장 체제에 좀 더 완전히 통합시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환경경제학은 대부분 공해와 환경 문제를 해결할 시장 창출을 목표로 하는 경제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 시장 지향적 기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환경에 피해를 입혀 비용을 높이는 경우에는 과세하고 환경을 증진하는 비용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주는 직접적 방법이다. 다른 기법은 자체적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는 것이다.
환경경제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방법은 국가를 활용해 오염 거래를 허용하는 등의 시장에 기반을 둔 동기를 유발하는 방법이다. 이 제도는 일정 수준까지 오염을 허용하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오염을 감소시키는 기업은 오염 거래를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과도한 오염을 지속적으로 방출하는 기업은 오염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환경을 상품 집합으로 변형하고자하는 환경경제학의 관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들의 목표가 환경 상품을 거래할 수 있는 대체 시장을 구축해 환경에 대한 시장의 실패를 극복하려는 것이라는 점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환경경제학의 방법론이 환경은 자기 규제적 시장 체제의 일부가 될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유토피아적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순간 이 이론은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은 시장의 수요 공급 법칙에 따라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생산된 상품이 아니다. 생태적 지속 가능성이 손상된 것은 경제가 환경 비용을 외부화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에 환경을 통합시키려는 자연의 상품화 때문이다. 환경 문제의 근원은 시장 실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경제 체제의 근본 성격에서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서 자연은 처음으로 순전히 인간을 위한 대상이자 그저 효용 수단으로 전락했다. 전체 사회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태학을 시장·상품 노선에 따라 구축하려는 환원주의적 접근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소유 개인주의적 용어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반영한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힘과 맺는 관계 안에서 인간의 욕구와 힘을 더 충실히 발전시키기보다는 자연을 사회에서 소외시켜 세계와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를 발전시킨다.
오염, 자원 고갈 등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의 모든 것에 상품 가격을 부여하고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환경을 경제에 내부화하는 것이 생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자주 제시되는데, 이는 문제를 단기적으로만 완화하는 경향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려고만 하는 자본주의 상품 경제의 동학은 결국 삶의 조건과 생산 조건 모두를 훼손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환경 비용의 시장 내부화를 더 광범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인기 있는 주장은 자연의 자본화를 시도한다. 자연의 자본화란 물리적 환경(자연)과 비산업화된 경제, 그리고 인간 고유의 영역(인간성)을 자본의 저장소라고 표현하고 이런 자본의 저장품들을 시장 내에서 거래 가능한 재산으로 코드화하는 일을 의미한다. 자본으로서의 자연과 지구라는 수사는 상품 교환을 위해 자연을 극단적으로 착취하는 현실에 연막을 치는 데 봉사할 뿐이다. 자연의 자본화는 자연을 상품 교환의 욕망에 더욱 종사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시장의 구조 내에서 사회적 환경적 비용 일체를 완전히 내부화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예컨대 열대우림은 전 세계의 생물종 절반 이상의 보금자리이며 지구 기후 조절에 매우 중요하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자기 규제적 시장체제에는 그러한 규모의 자연에 가치를 매길 방법이 없다. 우리의 도시, 지구의 대기, 인간의 삶 자체에 해를 미치는 자동차·석유 산업 복합체 하나가 사회와 지구에 미치는 비용을 내부화하는 일만 따져 봐도 모든 비용을 내부화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분명하다. 자연은 상품이 아니므로 자연을 상품으로 취급하거나 자동 조절되는 시장 법칙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는 모두 비합리적이다.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의 재생산이 불가능해져서 생물권은 과도한 착취를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상품 경제의 규모가 커질수록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멸종, 생물 다양성 감소, 열대우림의 절멸, 사막화, 유독성 폐기물의 확산, 대양의 오염, 환경 보건의 악화 등 우리가 겪는 생태적 문제의 수와 규모도 커져 왔다. 이러한 문제들은 여러 면에서 서로 독립적이지만 상호 연관되기도 하며, 비용을 외부화하든 자본의 끝없는 성장을 부추기는 경제에 자연을 내부화하든 모두 자연에 대한 상품경제의 영향이 그 근원이다.
생태적 전환의 전략
친자본주의를 표방하건 반자본주의를 표방하건 생태주의자들은 생태적 도덕성을 호소한다. 그 호소의 이면에는 개인의 도덕성이 사회의 도덕성의 해결 열쇠가 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가정이 숨어 있다. 각 개인이 자연을 존중하는 쪽으로 도덕적 태도를 바꾼다면, 환경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이런 도덕적 전환의 요구가 너무나 자주 간과하는 것은 생산의 바퀴라고 부르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제도적 사실이다. 생산의 바퀴는 계속 원료와 에너지 처리량을 늘려가는 추세에 있으며, 그럴수록 이윤 실현의 기회가 더 많아지기 때문에, 이 바퀴가 지향하는 방향은 지구의 기본적 생태 순환과 양립 불가능하다. 우리의 욕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종류에 따라 조절된다. 이렇게 본다면, 개인들은 자기의 소망에 따라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주적(主敵)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바퀴에 따라 활동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이 바퀴의 일부라서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 문제의 해결책으로 개인이 할 일은 지나치게 강조하는 반면 생산의 바퀴와 그것이 낳은 고도의 부도덕성은 별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처사는 제도적 사실을 무시한 채 개인에게 너무 무거운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개인 일반이 아니라 사회적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개인들의 윤리와 기업들에게 호소함으로써 환경 파괴를 막아 보려는 것이다. 기업인들의 행동의 윤리적 기반을 바꾸기만 하면 환경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을까? 사회의 최상위 계층은 기존 질서를 통해 가장 많이 이득을 보며 기존 질서의 변화를 꺼리는 사람들이다.
생산의 바퀴에 대한 저항은 주로 사회의 피라미드 밑바닥에서, 개인보다는 사회운동에서 나와야만 하며,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저항은 생태적 관심이 경제 정의의 문제, 즉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등의 문제와 결부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생태적 발전은 생산의 바퀴와 관련된 생태적 부정의는 물론 경제적 부정의의 문제를 제기할 때만 가능하다. 경제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은 더 갖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갖는 것에 관한 것이다. 기본적 필요와 장기적 안전을 충족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생산이나 심지어 환경보다도 사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생산의 바퀴의 고도의 부도덕성과 싸워 지켜내야 하는 공동의 도덕성이다.
환경 운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노동자들이 굳건한 환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포스터는 주장한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이 우선시되도록 만들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바퀴 자체에 직접적 이해관계가 거의 없는 사람들 처지에서는 환경을 파괴하는 데 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줄일 방법들이 많이 있다.
환경 운동은 환경에 대한 관심과 사회정의를 결합한 환경 정의라고 부르는 것에 헌신해야만 사회적 이유로 바퀴에 저항하는 개인들의 계급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의 적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경제·사회적 질서, 즉 자본주의 질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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