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은 학습능력이 뛰어난 정당이다. 다른 건 몰라도 암기에 관한 한 영재급의 능력을 갖고 있다.
조윤선 대변인이 말했다. "민주당 지도부가 (4대강) 예산 심의를 반대하고 있는데 의원 본인들도 중앙당과 입장이 같은지 아니면 예정대로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건지 분명히 입장을 밝혀 달라"고 촉구했다.
많이 본 장면이다. 세종시 문제를 놓고 민주당과 박근혜 전 대표 사이에서 연출됐던 모습의 복사판이다.
민주당이 요구했다. 박근혜 전 대표를 향해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 제정의 당사자이니까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응답했다.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고, 당의 존립을 걸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뒤에 불거졌다. 한나라당 안에서 갈등과 공방이 불거졌다.
익히 들은 목소리다. '동아일보'가 17일자에서 보도한 내용의 재생판이다.
'동아일보'가 조사했다. 민주당의 지역구 의원들을 대상으로 전화조사를 실시한 결과 4대강 사업과 관련해 12명(20%)이 '영산강 등 수질개선이 시급한 곳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응답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기타' 의견을 보인 12명까지 합하면 당론과 의견이 다른 의원이 24명(40%)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조윤선 대변인의 촉구는 민주당의 '이간계'를 교본 삼고 '동아일보'의 조사결과를 공식 삼아 응용에 나선 것이다.
▲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 ⓒ뉴시스 |
근데 어쩌랴. 암기력은 탁월한데 응용력이 떨어진다. 공식을 외우는 건 좋은데 대입할 문제와 아닌 문제를 구분하지 못한다.
조윤선 대변인이 대상으로 삼은 민주당 의원들이 말한다. "바닥 준설과 하천 정비가 영산강에 필요하지만 보와 둑 쌓는 공사가 핵심인 4대강 사업은 얘기가 다르다"고 한다. 돌아오는 대답이 민주당 지도부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 조사 결과에는 맹점이 있다. 당론과 다른 의원 수를 '더블'로 올려준 '기타' 의견 대부분이 '1조원 안팎으로 예산을 줄이면' '예비타당성 조사를 한다면' '예산안이 나오면' '청와대의 개선안이 나오면' 등의 단서를 단 것으로 민주당의 '즉각 중단' 당론과 크게 배치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민주당 의원들의 응답이 성에 안 차더라도 본전치기는 한다. 파워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민주당의 후방을 조금은 교란시킬 수 있다. 내주는 것 하나 없이 거둬들이기만 한다면 소소하지만 이득까지 챙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나라당은 되로 받고 말로 준다.
한나라당의 이간계 따라하기 덕분에 박근혜 전 대표는 정당성을 확보했고 활동공간을 넓히게 됐다. 이치가 그렇다. 민주당과 똑같이 남의 당 의원들에게 지도부와 다른 입장을 표명하라고 요구하는 판에 어떻게 자기 당 의원의 이견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박근혜 전 대표가 세종시 입장을 표명할 때까지만 해도 한나라당 지도부 입장은 원안 추진이었는데. 박근혜 전 대표는 날개를 달게 됐다.
한나라당은 민주당 샛문을 열려다가 자기집 뒷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남의 집 '피라미'를 그물에 가두려다가 자기 집 '월척'을 방생해 버린 것이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있다. 암기만 하고 응용은 소홀히 하다가 통합교과형 문제 앞에서 주저앉는 수험생들이 하는 말이다.
"그냥 찍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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