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TV에서 스포츠 뉴스는 밤 9시 메인뉴스가 끝난 뒤 별도 프로그램으로 편성된다. 무거운 시사 뉴스에 이어지는 스포츠 뉴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부터 엔딩 화면까지 시종 경쾌하고 발랄하다.
신문과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다. 무거운 지면을 가볍게 하는 양념처럼 시원하고 멋진 사진과 중계 기사가 하루에도 수백 개씩 쏟아진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일까?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하는 스포츠인들은 메달과 함성 뒤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제대로된 소식을 접해본 적이 있는가?
동아대 교수(스포츠과학부) 정희준의 칼럼이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지난 2007년부터 <프레시안>에 '정희준의 어퍼컷'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됐던 그의 칼럼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책 제목 역시 <어퍼컷>(미지북스 펴냄).
그의 글은 꾸준히 독자와 누리꾼에게 높은 인기다. 단순히 몰랐던 이야기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연재 시작부터 '팬'이라고 자처한 댓글이 쏟아질 만큼 그의 글은 감칠나는 '글맛'으로도 유명하다.
혹자는 올릴 때마다 논쟁을 부르는 그의 글을 두고, 그를 "진중권, 박노자를 잇는 우리 시대의 논객"이라고 평했다. 대체 어땠길래? 잠시 그의 글을 다시 들여다보자.
국가주의, 집단 몰입, 폭력을 향한 '어퍼컷'
▲ <어퍼컷>(정희준 지음, 미지북스 펴냄) ⓒ프레시안 |
"체육계와 지도자들은 선수들을 자신의 '종'으로, 성공의 도구로,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존속을 위한 방편으로 여기는 못된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협회나 학교 운동부 다 없애도 된다. 이런 야만적, 비이성적 스포츠가 도대체 이 시대에 어울리는가."
정희준의 글에는 일관되게 흐르는 몇 가지 주제가 있다. 첫 번째는 국가주의, 두 번째는 집단 몰입, 혹은 집단적 자아 도취다. 월드컵, 올림픽, WBC 등 세계 대회가 열릴 때 한국 사회의 풍경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는 곧 한국 스포츠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들이 맞물려 세 번째 특징을 낳았다. 바로 폭력과 함께 성장하는 선수의 삶과 인권에 대한 철저한 외면이다. 그는 학생 선수부터 프로 선수에 이르기까지 한국 스포츠에 만연한 폭력을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잠시 잊었다 싶으면 튀어나오는 선수 폭력, 성폭력 사건은 계속됐다.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본격적인 학생 선수 인권 실태 조사에 나서고 사회적 여론이 높아진 것에는 꾸준한 그의 문제제기도 한 몫을 했다. 당시 전국의 중·고교 학생 운동선수 중 78.8퍼센트(%)가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고, 63.8퍼센트는 성폭력의 피해를 겪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스포츠 선수의 학습권과 인권을 보장하는 구조적인 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도 확산되고 있다. 아직 스포츠계의 인식 전환이 요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이드라인이 지정되고 경기 방식이 바뀌는 등 변화는 그래도 '진행 중'이다.
스포츠 스타, 스포츠 이벤트를 '무풍 지대'에서 끌어내다
"박태환, 장미란 등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바로 몸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 딱지가 붙은 '슈퍼 바디', '내셔널 바디'다. (…) 이들의 몸은 한 세기 전 조선인의 몸도, 근대화 시기 이상적 남성상이던 이대근·백일섭의 몸도, 수영장 가서 셔츠로 몸을 가려야 하는 우리 삼촌들의 몸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배웠다는 교수들조차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세계 대회 유치라는 것이 사실상 신기에 가까운 뻥튀기요, 혹세무민의 경연장이기 때문이다. (…) 이제 스포츠 메가 이벤트가 겉만 번지르르하지 실상은 빚잔치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 빚잔치의 뒷감당은 누가 할까. 누가 하긴. 바로 그 지역 주민들 아니겠는가."
스포츠 스타에 대한 정희준의 비평은 특히 격렬한 반응을 불렀다. 박지성, 김연아 등 이 시대 최고의 스타와 주변인을 거침없이 비판한 그의 글을 두고 누리꾼들은 찬반으로 갈려 격한 논쟁을 벌였다. 또 김일, 추성훈 등에 대한 글은 인물과 시대 비평을 아우르며 스포츠 스타 비평의 정수를 보여줬다.
월드컵, 올림픽, WBC 등 그동안 '비평'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었던 대형 스포츠 이벤트도 그의 주요 비판 대상이었다. 재수, 삼수를 마다하지 않고 스포츠 이벤트 유치에 몰입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의도, 그리고 감춰진 스포츠 이벤트의 폐해를 그는 줄기차게 드러냈다.
이처럼 그동안 한국 스포츠계에서 '무풍 지대'였던 대상과 영역을 비평한 그의 글은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는 "왜 자꾸 그러냐고, 체육학과 교수가 그러면 되냐면서 사실상 '조직'의 논리를 강요한 '충고'도 여러 번 들었다"고 토로했다.
그의 칼럼이 '이단'이 아닌 '보물'인 이유
"세계 최고의 기업들은 한 우물을 판다. KFC가 닭튀김으로 성공했다 해서소 튀김을 내놓지도 않고, 또 현지화하겠다며 한국에서 삼계탕을 팔지도 않는다. 그러나 삼성은 다 한다. 돈 되는 건 다 한다. 서민들 밥그릇까지 뺏어간다."
"스포츠 선교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운동선수들은 한판 메치고 기도하고(이원희, 장성호), 금메달 따고 기도하고(장미란), 골 넣고 기도하고(박주영, 이영표, 최태욱), 경기 종료 후 대표 팀 전원이 둘러앉아 기도하니(남자 배구) 스포츠 스타는 선교의 효과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희준의 비판은 스포츠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그는 특유의 '어퍼컷'을 가했다. 특히 전 대통령 노무현 서거 당시 한국의 보수를 비판하며 쓴 추모사는 수많은 누리꾼이 "내 심정을 정확히 표현했다", "몇 번이고 다시 보며 울었다" 등의 댓글을 남겼다.
그의 싸움은 힘겹다. 한국 스포츠계에서 그와 비슷한 논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겐 '안티'도 많다. 박지성과 김연아를 비판했을 때, WBC와 월드컵을 비판했을 때 누리꾼들은 그를 '축빠(축구광팬)', 혹은 '야빠(야구광팬)'로 몰아가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사실 그의 글이 '불편함'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론과 전문가가 철저히 외면하고 가렸던 한국 스포츠의 아픈 구석을 찌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냥 화려하고 즐겁기만 한 스포츠 뉴스에 익숙했던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이다.
어찌 보면 그의 글은 열광 속에 죽어가는 스포츠 선수,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는 '살아있는 스포츠'를 하자는 당연하고도 간곡한 호소다. 그의 칼럼과 책이 한국 스포츠계의 '이단'이 아닌 '보물'인 이유다.
그는 머리말 끝에 이렇게 남겼다.
"오해 없기 바란다. 이 사회에서 스포츠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스포츠는 역시 필요하다. 운동 없이, 스포츠 없이 우리는 과연 살 수 있을까. 다만 나는 선수 '자신'이 아닌 감독과 협회를 위한 스포츠, 국가를 위한 스포츠에 이의를 제기할 뿐이다. 그리고 나쁜 점만 고치자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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