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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조선, 여성을 덮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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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음란한' 조선, 여성을 덮치다

[의학사 산책] 성병, 여성의 병?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보들레르, 링컨, 플로베르, 모파상, 고흐, 니체.

이들의 공통점은? 유명한 인물? 다른 것이 있다면? 모두 매독 환자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성병은 그만큼 흔한 질병이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886년에 발행된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에 의하면 매독은 말라리아 다음으로 많은 질병이었다. 알렌과 헤론은 매독이 "흔한 질병이었고, 치료가 불가능해질 때까지 치료를 하지 않는 환자가 많은 것 같다"고 적었다.

특이한 점으로 항문 점액성 종양이 있었다. 이들은 이 질병이 "여성 대신 소년을 이용하는 변태적인 성적 쾌락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고 추정했다.

▲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의 매독 관련 부분. ⓒ동은의학박물관

한국을 좀먹는 매독

▲ 지석영의 '양매창론'(황성신문, 1902). ⓒ동은의학박물관
매독은 한국의 미래에 어둠을 던지는 존재였다. 지석영은 매독이 끼칠 피해를 우려했다. 의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1902년 매독에 관한 글을 썼다. '양매창론(楊梅瘡論).' 그는 외과를 찾아오는 환자 중 매독 환자가 70~80%를 차지한다고 썼다. 예방법을 찾지 않으면 성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추측도 내놓았다.

지석영에 따르면 성병은 콜레라나 페스트와 같은 급성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왜냐하면 급성 전염병과 달리 꾸준히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제는 성인 남자들이 성병에 걸린다는 점에 있었다. 이들은 한국의 부강을 이끌어야 할 주체들이었다. 성병은 국가의 부강을 좀먹는 질병이었다.

성병의 만연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성병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한 전문학교의 입학생을 조사한 결과 1할 이상이 성병에 감염되었다는 수치가 나왔다. 1936~7년 사이 건강상담소를 이용한 사람 중 성병 환자는 10~13%를 차지했다.

농촌 위생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이영춘은 결핵, 기생충과 함께 매독을 민족의 3대 독(毒)이라 이름 지었다. 그만큼 성병은 넓게 오래도록 한국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성병의 만연은 치료제의 부재(不在)를 의미했다. 성병 치료제로는 수은이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치료 과정이 고통스러웠고, 중독성이 있었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는 "수은 치료 때문에 침을 흘리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고 적고 있다. 수은 중독으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병 치료제 살바르산

▲ 살바르산의 발명자 에를리히(Paul Ehrlich). ⓒ동은의학박물관
성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은 1911년 찾아왔다. 에르리히(Paul Ehrlich)는 화학 요법의 시조라고 할 살바르산(Salvarsan)을 만들어냈다. 매독 치료제였다. 606번의 실험 끝에 만들었다고 하여 '606'이라고도 불렸다. 살바르산은 인류에게 질병을 정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약제였다.

살바르산은 한국에도 수입되었다. 하지만 비쌌다. 1930년대 중반 살바르산 가격은 10개에 18원이었다. 의사 월급이 40원 하던 때였다. 이익도 많이 남았다. 너도나도 살바르산을 파는데 몰두했다. 당시 의사들이 모두 성병 치료하는 데 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는 회고가 있을 정도였다.

치료제가 비싸다보니 '대안'을 찾는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1933년 평안북도 신의주의 한 제지회사 하수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공장에서 원목을 분해할 때 사용하는 공업용수가 성병에 좋다는 소문이 난 것이었다.

성병 환자들은 옷을 벗고 목욕을 했다. 미풍양속에 걸맞지 않았지만 경찰은 말릴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경찰은 제지회사에 "가난한 환자를 위하여 목욕할 설비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성병의 전염원 매춘부

▲ 매춘부 검진에 관한 기록(1906). ⓒ동은의학박물관
치료가 원활하지 않을 때 최선의 대안은 예방이었다. 예방을 위한 노력은 식민지 시대 이전에 시작되었다. 1906년 매춘부에 대한 건강 검진이 시작되었다.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설립된 경무고문부의 작품이었다. 매춘부는 정기적으로 1개월에 2회씩 검진을 받아야 했다. 성병에 걸린 매춘부는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위반할 경우 매춘부는 물론 영업주도 처벌받았다.

일제가 볼 때 매춘부는 성병의 주요 매개자였다. 일제뿐 아니었다. 서양 의학을 수용한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석영은 기생들의 명부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명부는 정기 검진을 진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유병필은 "한국이 음란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진단했다. 주범은 매춘부였다. 종류도 다양했다. 관기, 예기, 삼패(三牌), 은근짜(隱裙)까지. 유병필은 이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병과 여성

그러나 성병은 전염병이었다. 매춘부는 전파자도 될 수 있지만 피해자도 될 수 있었다. '손님'이 주범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단속의 손길은 너그러웠다. 단속의 대상은 매춘부, 즉 여성이었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는 그 점을 지적했다.

"건강 검진을 하여 건강한 여성만 남자를 상대하게 한다 하자. 성병에 걸린 남자는 없단 말인가? 시간이 지나면 오늘 건강한 여성이 내일은 병에 걸릴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단속의 대상은 여전히 여성이었다. 건강한 여성에 대한 갈구는 공창제(公娼制)로 이어졌다. 1916년 '예기작부예기치옥(藝妓酌婦藝妓置屋) 영업취체규칙 및 대좌부창기(貸座敷娼妓) 취체 규칙'이라는 긴 이름의 법령이 반포되었다. 공창제를 법적으로 확정한 규칙이었다. 이 규칙은 창기의 정기적인 건강 진단과 예기 작부의 건강서 제출을 규정하였다.

건강한 여성에 대한 갈구

▲ 일제 시기 임질약 광고. ⓒ동은의학박물관
공창제가 필요하다고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공창은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에 미치는 해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풍기 문란을 막을 수 있고, 성병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문제는 사창(私娼)이었다. 사창은 단속이 불가능한 만큼 피해가 컸다. 그들이 볼 때 공창제는 성병의 오염에서 남성을 보호하는 '좋은' 제도였다. 하지만 더 싼 여성을 찾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공창제는 그들을 막을 만큼 튼튼하지 못했다.

1930년대 말에는 '성병예방법'이 입안되었다. 이 법은 공공단체가 성병 치료를 위한 치료소를 설치할 것을 규정하였다. 치료소의 경비는 국고에서 일부 보조하도록 하였다. 의사가 성병 환자를 진단하였을 때는 전염 방지 방법을 지시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이 법에서도 성병 전파자는 여성이었다. 성병 환자의 매춘은 금지되었고, 매춘을 주선한 경우에는 체형까지 받을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 건강한 여성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갈구는 '위안부'로 나타났다. 1944년 '여자정신대 근무령'으로 시작된 여성의 전쟁 동원은 마침내 위안부까지 이른다.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남성을 성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쟁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절, 남성은 보호받아야 할 신체였다.

보호해야 할 남성

성병의 역사는 한국에서 남성과 여성의 지위를 알려준다. 남성의 성적 욕망은 '정당'했다. 국가는 그 욕망을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반면 여성은 아니었다. 여성은 건강한 몸을 간직해야할 의무만 있었다. 설사 남편이 성병을 전해주었을지라도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아내였다. 치료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아내가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자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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