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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낭만적인 하지만 치명적인 그것은…

[의학사 산책] 결핵, 공포의 전염병

"결핵은 원래 재주 있는 사람의 병이다. 머리가 뛰어나게 좋고, 재주가 남보다 많고, 눈물도 남보다, 웃음도 남보다, 정열도, 공상도 남보다 많은 사람에게 많다."

1935년 결핵 환자들의 '파라다이스' 해주구세요양원을 찾은 잡지 <삼천리> 기자의 글이다. 결핵에 대한 일종의 질투마저 느껴진다. 전염병 중에서 결핵은 가장 낭만적인 병이었다. 환자들의 "얼굴은 백옥 같았고, 손은 여인의 손처럼 아름다웠으며 눈에는 광채가 돌았다."

하지만 현실은 기자의 눈과 달랐다. 한센병과 결핵 중 하나를 고르라면 사람들은 차라리 한센병을 골랐다. 결핵에 걸리면 환자는 철저히 외톨이가 되었다. 전염의 우려 때문이었다. 한센병 환자들이 나누는 유대감은 허용되지 않았다. 결핵은 현실에서 낭만이기보다는 공포였다.

▲ 결핵 치료를 위해 사용되었던 일광 치료와 기흉기. ⓒ동은의학박물관

결핵 예방을 위한 첫 걸음

식민지 시대 한국에는 대체로 40만 명의 결핵 환자가 있다고 추정되었다. 이들에게 미래는 없었다. 특효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과 시술로 인공기흉법이나 폐절제술이 개발되었지만 후유증이 있었다. 폐 기능이 저하되거나 장애가 발생했다. 치료약이 없다보니 의사들도 결핵 환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았다. 서서히 죽어갈 바에야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는 환자들이 나왔다. 결핵 확진은 사형 선고를 의미했다.

치료가 힘든 만큼 예방은 더욱더 중요했다. 1918년 조선총독부는 결핵 예방을 위한 법률을 공포하였다. 폐결핵 예방에 관한 건. 핵심은 공공장소에 가래를 뱉는 담통(唾壺)을 설치하라는 것이었다. 담통에 대한 정기적인 소독은 필수였다.

언론은 환영의 뜻을 표했다. 이 법령이 완벽하게 실시되면 개인의 행복은 물론 '조선 개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법령이 예방의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하다는 점은 분명했다. 일본에 있는 결핵예방협회 같은 단체가 한국에도 설치되어야 했다. 요양소의 설립도 뒤따라야 했다.

▲ 한국에서 처음 건립된 세브란스의 결핵병사(1920)와 해주구세요양원(1928). ⓒ동은의학박물관

결핵병사와 해주구세요양원

▲ 결핵으로 사망한 의학생. ⓒ동은의학박물관
식민지 시기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소는 치료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치료약이 없으니 결국 환자 자신의 저항력을 높여 결핵을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요양소 입원은 저항력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환자는 요양소에서 제공하는 음식으로 영양을 취할 수 있었다. 요양소가 보통 휴양지에 설립된 만큼 따뜻한 햇볕을 쬐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일도 가능했다. "휴식, 신선한 공기, 햇빛, 유능한 간호가 매일 기적"을 만들 수 있었다.

요양소에 먼저 주목한 쪽은 의료 선교사였다. 1920년 3월 세브란스의 내과 교수 스타이스는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한국 최초의 결핵병사를 지었다. 나아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교직원, 학생 및 동문들은 1928년 10월 세브란스항결핵회를 창립했다. 학생들은 연극 공연인 <분극의 밤> 수익금을 결핵회에 기증하는 등 결핵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학생들 중에도 결핵 환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셔우드 홀은 해주에 본격적인 요양소를 처음 설립하였다. 앞에서 말한 해주구세요양원이다.

홀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가 가족같이 생각하던 박에스더의 죽음이었다.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였다. 홀의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을 따라 미국에 간 그는 1900년 미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의료 사업에 매진하던 그는 1910년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박에스더의 죽음은 셔우드 홀을 결핵 전공 의사로 만드는 계기였다.

크리스마스실의 발행

▲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1932). ⓒ동은의학박물관
결핵에 대한 홀의 관심은 크리스마스실(Christmas Seal) 발행으로 이어졌다. 1932년 홀은 결핵 기금 마련을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였다.

처음에는 거북선을 도안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총독부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거북선은 일제에게 치욕을 느끼게 하는 상징이었다. 결국 도안이 남대문으로 바뀌었다. 남대문은 한국을 상징하는 동시에 결핵을 막는 성벽을 상징하였다.

크리스마스실은 인기를 끌었다. 이익금은 결핵 퇴치를 위해 애쓰는 선교 병원에 나누어졌다. 예상치 못한 반응도 있었다. 어느 날 편지가 한통 도착했다. 크리스마스실을 구입한 환자였다. 내용은 돈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매일 밤마다 저는 이 실을 정성껏 가슴에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 약을 붙여도 나의 심한 기침은 조금도 낫지 않았습니다. 돈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렴한 요양소의 설립이 필요하다!

요양소가 각광을 받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비용이 문제였다. 해주구세요양원의 한 달 진료비는 60~80원 정도였다. 1930년대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 생활비는 50원 정도였다.

요양소는 일반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숫자도 적었다. 일반적인 이야기는 1년에 사망하는 결핵 환자 수만큼의 병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한국이라면 4만 개가 필요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100분의 1에도 미치지 않았다. 대책이 필요했다. 값싼 요양소가 많이 설립되어야 했다.

일본의 경우 이미 1910년대부터 요양소 설립이 추진되었다. 일정한 인구 이상의 도시는 공립 요양소를 설치해야 했다. 국고 보조도 있었다. 일본의 요양소 병상 수는 1만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국에도 공립 요양소가 설립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안 나올 수 없었다. 언론은 최소한 인구 10만을 넘는 도시, 예를 들면, 서울, 평양, 대구, 부산 등에 시급히 요양소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결핵과 관련된 서적들. ⓒ동은의학박물관

전쟁과 결핵

특히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요구는 빗발쳤다. 전쟁 때문이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도 전시 체제로 접어들었다.

당시의 전쟁은 총력전이었다. 군인만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 전체가 참여해야 했다. 국민 모두가 건강하게 몸을 가꿔 언제든지 국가를 위하여 싸울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결핵은 이 준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었다. 전쟁에 동원될 청년들이 주요 감염자였기 때문이다. 전쟁 승리를 위해 결핵 대책은 반드시 필요했다.

1936년 조선결핵예방협회가 결성되었다. 체계적인 결핵 대책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였다. 협회는 4만 명을 수용할 결핵요양소의 건설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요양소 건설에는 수용인원 1명 당 약 1만 원의 예산이 필요했다. 4만 명이면 4억 원이 필요했다. 참고로, 1937년 조선총독부의 총 세출은 4억 2200여만 원이었다. 4만 명 수용의 결핵요양소 설립은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개인 위생의 강조

▲ 결핵 치료제 광고.. ⓒ동은의학박물관
결국 일제는 자신들의 돈이 들어가지 않는 대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개인 위생의 강조였다. 1918년 법령에서 규정된 담통(唾壺)의 설치가 다시 권장되었다. 만일 함부로 가래나 침을 뱉으면 엄중한 단속이 뒤따를 것이라는 위협도 이어졌다. 영양의 개선도 강조되었다. 밥을 많이 먹고, 어육류와 채소를 균형적으로 섭취하며, 지방과 단백질이 풍부한 영양물을 먹으라는 충고였다.

하지만 다시 문제는 돈이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한 논자는 "조선 사람으로 휴식과 영양을 반 년 동안이나마 충분히 실행할 돈이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반년 이상을 그렇게 보내면 온 집안이 거덜 나 아픈 사람은 물론 성한 사람마저 굶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석유, 결핵 치료제?

사실 한국에 결핵 환자가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가난에 있었다. 가난했기에 좁은 집에 살 수밖에 없었고 감염 위험은 그만큼 높았다. 가난했기에 잘 먹을 수 없었고 결핵균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한국인들이 결핵 치료에 석유가 효과 있다는 기사를 읽고 열광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석유는 누구나 "값싸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약'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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