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1차 탈락하자, 지원 서류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함께 채용을 간곡히 호소하는 편지를 제출하며 같은 해 재응시했다.
박 전 대통령은 편지에서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며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라며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은 세 차례의 시도 끝에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우등생으로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했다. 1944년 12월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이어 그는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만주신문>은 만주국에서 배포되던 일본어 신문이다. 이 자료를 공개한 이유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 자신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원사료를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소가 제작한 <친일인명사전> 관련 보도가 나오자 연구소에 욕설과 폭언을 하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하루 전인 지난 4일, 박지만 씨는 지난달 28일 냈던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에 배포금지 사유를 추가해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법원이 박지만 씨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인쇄가 이미 끝난 <친일인명사전>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게 돼 8일로 예정된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도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법원은 앞서 국민보고대회 전까지 심리를 끝마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어 최종 결정이 주목된다.
▲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 해당 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밝혔다. 좌측 상단 원 안의 사진의 인물이 박 전 대통령이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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