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에서 문둥이는 아이를 먹는다. 천형(天刑)과 같았던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다.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 즉 한센병을 하나의 생명을 바쳐야 나을 수 있는 하늘의 형벌로 생각했다. 아이들이 한센병 환자를 호랑이만큼이나 무서워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끄집어 먹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두려운 한센병 환자
한센병 환자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외모에서부터 왔다. 한센병에 걸리면 눈썹이 빠지고 피부가 문드러지고 농즙이 흘렀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까지도 한센병 환자를 꺼리고 멀리하였다. 그들은 완전히 버림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치료의 가능성이 희박한데다 주위의 버림까지 받은 한센병 환자는 자살을 시도하곤 했다.
식민지 시대에는 대체로 1만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구걸이었다. 거리를 방황하며 구걸을 하는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왔다. 전염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은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동네에 들어오려는 환자들은 주민들에게 집단적으로 구타당했다.
한센병에 대한 관심
▲ 에비슨이 촬영한 나병 환자(1900년대 초). ⓒ동은의학박물관 |
환자들에게 따뜻한 손을 처음 내민 이들은 의료 선교사였다. 1909년 미국 북장로회는 부산에 한국 최초의 수용소를 설립하였다. 수용소는 대구, 광주로 늘어났다. 환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대상이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를 하느님은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자들은 내세에서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의료 선교는 국가가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환자들에게 파고 들어갔다.
일제도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공중 위생이나 치안의 측면에서 한센병 환자들은 위험했다. 나아가 환자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은 '문명국' 일본에 걸맞지 않았다. 그들에 따르면, 서양 문명국에서 한센병 환자는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었다. 오직 러시아나 발칸반도에 소수의 환자가 있을 뿐이었다. 한센병은 문명의 걸림돌이자 "국가의 치욕"이었다.
소록도 자혜의원의 설립
1916년 일제는 10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소록도 자혜의원이었다. 일본 황실에서 제공한 임시 은사금(恩賜金)이 재원이었다. 수용 인원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각 도(道)에 환자의 수가 배당되었다.
부양을 받을 길이 없어 거리를 배회하는 중증 환자들이 첫 번째 수용 대상이었다. 환자 수용은 용이하지 않았다. 소록도에 송치가 결정된 환자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불안감이 심해지면 수송 도중 바다로 뛰어들었다.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생활
▲ 광주의 나환자촌. ⓒ동은의학박물관 |
소록도 자혜의원은 경증(輕症) 환자를 수용하는 보통 병사, 중증(重症)과 부자유한 환자를 수용하는 중증 병사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증 환자 1인에 대해 1인의 경증 환자, 부자유한 환자 2~3인에 대해 경증 환자 1인이 함께 하였다. 경증 환자들은 다른 환자들을 간호하였다. 모범 환자에게는 '작업 조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들은 각종 작업을 지도하거나 병사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맡았다.
환자들의 하루 일과는 오전 치료 시간, 오후 작업 시간으로 나뉘었다. 노동을 할 수 있는 환자는 노동에 종사했다. 야채의 경우 환자가 직접 재배하여 자급자족을 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환자 중 학식이 있는 사람은 강사가 되어 다른 환자들을 가르쳤다. 종교 시설로 예배당이 세워졌다. 소록도는 일종의 공동체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확장되는 지상 낙원?
소록도 자혜의원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수용 인원은 1923년 25명, 1925년 125명, 1928년 200명, 1929년 300명, 1932년 20명씩 증가되어나갔다. 병원의 대규모 확장은 1932년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 해에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가 설립되었다. 협회의 설립 목적은 병원 확장에 있었다.
협회의 기부로 소록도의 민간 소유지가 모두 구입되었다. 확장 공사가 이어졌다. 1934년 2000명, 1935년 1000명, 1937년 1000명, 1939년 1000명의 정원이 증가되었다. 1941년 소록도는 577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 있던 환자의 반 수 가까이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일제의 표현에 따르면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이상적 낙원"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 소록도 자혜병원 가동병사(假東病舍). ⓒ동은의학박물관 |
확장 공사와 환자의 고통
그러나 확장 공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사에는 환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벽돌 제조, 자재 하역, 골재 운반, 도로 개설, 도배 등을 담당하였다.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환자들은 열의에 차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 그들은 강제로 이루어지는 노동에 지쳐갔다. 나중에는 분노했다.
1941년 수용 환자 중 한 명이 특수 공로자로 표창까지 받은 환자 대표를 살해했다. 개원 이래 처음 발생한 살인 사건이었다. 살해 동기는 "6000 환우(患友)의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살해자는 피살자가 "상관에게 붙어 환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그로 인해 죽어간 환자가 수도 없이 많았다"고 밝혔다.
1942년에는 원장이 수용 환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역시 환자에 대한 대우가 심하다는 이유였다. 살해자는 "너는 환자에게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라고 외치며 원장을 찔렀다. 그는 수용소의 부정을 폭로하여 환자에 대한 처우 개선을 도모할 계획도 있었음을 밝혔다. 소록도의 확장이 곧 환자의 복리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한센병은 범죄?
▲ 조선나예방협회의 영수증. ⓒ동은의학박물관 |
확장 공사가 진행되던 1935년 조선나예방령(朝鮮癩豫防令)이 제정되었다. 핵심은 "예방상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나환자를 조선총독부 나요양소에 입소시킬 수 있다"는데 있었다. 강제 격리가 법률적으로 확정된 것이었다. 이제 한센병은 일종의 범죄였다. 범죄자가 형무소에 감금되듯이 한센병 환자는 강제로 소록도에 이송되었다.
범죄를 저지른 한센병 환자에 대한 조치도 취해졌다. 같은 한센병 환자들도 범죄를 저지른 환자들은 싫어했다. 형무소에 수감된 일반 범죄자들은 한센병 환자를 터부시했다. 전염의 우려도 있었다. 일제는 1935년 소록도에 별도의 형무소를 완공하였다. 일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로 이송되었다. 형기를 마쳤다고 소록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요양소에 수용되었다.
한센병 환자와 단종
▲ 조선나예방협회의 감사장. ⓒ동은의학박물관 |
한센병에 대한 격리는 환자들에 대한 단종(斷種)으로 나아갔다. 소록도 자혜의원은 개원 이래 남녀별거제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설비 확장으로 부부 환자의 수가 증가하자 1936년부터 부부의 동거를 허용하였다. 다만, 일정한 조건을 갖출 경우에 한정했다. 예를 들면, 호적상 부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하여 곧장 동거가 허용되지는 않았다. 더 큰 조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단종이었다. 한센병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방법은 거세 이외에는 없다는 주장이 학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다.
나쁜 인자를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정신병자 역시 단종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우생학이 유행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단종은 범위를 넓혀갔다. 도망가다 잡히거나 잘못으로 감금실에 갇힌 환자들도 단종 수술을 받았다. 한센병은 씨를 말려야 할 대상이었다.
강제 격리와 한센병
다시 처음 시로 돌아가자. 시에서 문둥이는 하늘과 해를 피하는 존재였다. 해가 지고 달이 떠야만 세상에 나오는 존재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격리된 존재였다. 한센병은 그들을 세상에서 격리시켰다. 한센병의 역사는 세상이 전염병을 어떻게 격리해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한센병의 역사는 그 병이 필요 이상으로 격리되어왔음을 보여준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강제 격리가 사라진 것은 1963년이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