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는 악귀에 의해서 발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균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생물에 의해서 발병됩니다. 만약 당신이 콜레라를 원치 않는다면 균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음식은 반드시 끓이고, 끓인 음식은 다시 감염되기 전에 먹기만 하면 됩니다."
제중원 원장 에비슨이 주도하여 서울 각 지역에 붙인 콜레라 예방 포스터였다. 콜레라균이라는 낯선 이름이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호열자, 한국을 습격하다!
▲ 일본에서 발행된 콜레라 예방 지침. ⓒ동은의학박물관 |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하얀 쌀뜨물 같은 설사를 했고, 토했다. 심하게는 하루에 20리터를 싸거나 토해냈다. 자연히 피부는 쪼그라들었다. 사람들은 미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환자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 병을 괴상한 질병, 즉 괴질(怪疾)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다른 이름이 수입되었다. 호열랄(虎列剌). 일본어로 읽으면 코레라였다. 한국인들은 그 이름을 다르게 읽었다. 호열자(虎列刺). 호랑이가 살점을 뜯어 가는 듯한 고통을 주는 질병. 그 이름만으로도 고통스러웠던 콜레라 유행의 시작이었다.
1895년 콜레라 발생과 방역위원회
개항 이후 1879년, 1886년 한국을 강타한 콜레라는 1895년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한국을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충돌한 청일전쟁 와중이었다.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인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와중이기도 했다. 평안도 지역에서 발병한 콜레라는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정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발 빠른 대처를 했다. 검역 규칙을 만들고, 호열자병 예방 규칙을 반포하였다. 주요 교통로에는 검역소가 설치되었다.
방역위원회도 조직되었다.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서양 의료 선교사, 일본 의사가 망라되었다. 내부대신이던 유길준은 방역위원장에 에비슨을 임명하였다. 유길준은 에비슨에게 "상당히 많은 돈과 20명의 경찰을 주었다. 경찰이 말을 듣지 않으면 면직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었다." 과도한 권한 부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콜레라 방역을 위해 그만한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방역위원회는 환자를 격리할 피병원(避病院)을 만들고 계몽 활동을 벌였다. 위에서 말한 벽보 부착도 그 활동 중 하나였다. 1895년 콜레라는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시기 전개된 방역 활동에 대해 일제조차 "전례가 없는 시설을 하였다"는 평가를 하였다. 일본에서 콜레라를 '위생의 어머니'라 부른다. 역설적이지만, 위생 제도를 체계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콜레라는 한국에 체계적인 방역 제도를 만들어준 '고마운' 존재였다.
▲ 호열자 예방 규칙(1895). ⓒ동은의학박물관 |
콜레라와 검역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콜레라의 위세는 잦아들지 않았다. 콜레라를 막기 위한 방역 조치의 강도는 더 세졌다. 중국이나 일본에 콜레라가 유행하면 각 항구에서 검역이 이루어졌다. 유행지에서 온 선박들은 모두 검역 대상이었다. 승무원이나 승객들은 검변(檢便)의 대상이었다. 가장 확실한 콜레라 확진 방법이 대변 검사였기 때문이다.
기차역에서도 검역이 이루어졌다. 경찰이 기차에 올라가 승객들을 검사했다. 콜레라 감염자로 의심되면 그 승객은 물론 동승객들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강제로 바지를 내렸다. 대변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콜레라는 남의 바지를 끌어내릴 만큼 힘이 셌다.
경찰의 호구 조사와 격리
▲ 경찰에 의한 호구 조사(1920). ⓒ동은의학박물관 |
방문 조사는 철저히 진행되었다. 절도 피해가 줄어드는 부수 효과도 있었다. 매일 경찰이 동네를 돌아다니니 도둑들이 움직이기 불편할 것은 당연했다.
한국인의 순화원 기피
▲ 콜레라 환자 격리소(피병원, 1920). ⓒ동은의학박물관 |
수용 환경도 한국인에게 적절하지 않았다. 음식이 한국식이 아니었다. 서양 의학 일변도의 치료법은 낯설었다. 한국인들은 찬 것을 싫어했는데, 의사들은 얼음찜질을 했다. 병실도 따뜻한 온돌방이 아니라 마루방이었다.
더구나 환자를 데리고 가는 경찰의 태도가 문제를 일으켰다. 경찰은 환자를 범인 취급했다. 수갑을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연행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경찰은 술에 취해 잠을 자던 사람을 환자로 오인하여 연행하였다.
반일 의식과 사립 피병원
▲ 피병원 설립 운동의 결실로 세브란스에 건축된 경성부민병동. ⓒ동은의학박물관 |
이 피병원은 여러 가지로 한국인에게 적합했다. 우선 의료인으로 한국인을 채용할 예정이었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일본 의사와 비교할 수 없었다. 한방 치료도 병행할 계획이었다. 한의학이 콜레라에 특별한 치료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정서적으로 한의학에 익숙했다.
그러나 사립 피병원 설립 운동의 밑바닥에는 삼일운동에서 폭발한 반일 의식이 있었다. 한국은 일본과 기후가 다르고 옷 음식 집이 달랐다. 한국인의 위생 관습은 수천 년 동안 한국인 스스로 발전시켜온 것이었다. 일제는 그 관습을 무시한 채 자신의 마음대로 방역을 실시하였다. 한국인들은 그 일방성이 싫었다. 사립 피병원은 일제가 세운 관립 피병원, 나아가 일제의 방역 정책에 대해 한국인이 내세운 대안이었다.
강제와 동의
식민지 시기 콜레라는 1919~1920년을 정점으로 하여 점차 잦아들었다. 강력한 검역과 단속의 효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립 피병원 설립 운동은 일제가 진행한 콜레라 방역이 한국인의 광범위한 동의를 받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일제의 급한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전염병이 급속도로 확산된다면, 어느 정도의 강제성은 불가피하다. 일제가 의식했는지 모르지만, 부수 효과도 있었다. 강제적인 방역을 수용하면서 한국인들은 서서히 일제의 지배도 수용하였다. 일제의 방역은 기본적으로는 공공의 목표를 실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제성을 인정한다 해도 궁극적으로 동의는 필요했다. 동의 없는 강제가 계속되는 한 반발은 사라질 수 없었다. 위생 환경의 개선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주장도 타당했다. 하지만 경찰 위주의 방역은 식민지 시기 동안 지속되었다. 한국인에게 방역은 그렇게 강제적으로 다가왔다. 그 강제성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자각이 필요했다. 내 몸의 주인은 나라는 자각. 하지만 식민지는 그 자각을 용인하기에는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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