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한국 정부, '다문화'라는 말을 쓸 자격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옹졸한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그래서 인권, 시민단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26일 낮 법무부 앞에서 열린 집회도 이런 흐름의 한 갈래다.
'미누 석방 공동대책위원회'가 마련한 이날 집회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권영국 변호사는 "문화활동가로 일했던 선량한 이주민인 미누 씨가 정부의 인정머리 없는 이주 정책에 의해 추방됐다"며 "이 추방은 포용을 핵심어로 하는 정부의 다문화 정책을 무색케 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밑바닥 인생을 거치며 미누 씨가 제공한 노동력을 철저히 이용했던 정부가 정작 그의 권리를 무시한 것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과 같다"며 "정부는 다시는 다문화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홍세화 "나도 이주노동자였다"
이날 집회에는 언론인 홍세화 씨도 참가했다. 그는 "나도 이주노동자였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가 남민전 사건에 연루된 1979년부터 2002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택시 운전사 등을 하며 지냈던 것을 가리킨 말이다. 홍 씨는 "미누 씨에게 고향이라고 할 한국이 피도, 눈물도 없으며 법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반인권적 단속을 벌이는지 헤아릴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날 참가자들이 한국 정부의 옹졸한 태도에 분노했던 대목은 다양했다. 법무부는 미누 씨를 추방하며, 변호인들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권영국 변호사는 "한국 정부가 미누 씨의 재판청구권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아예 묵살했다"며 "법무부가 법질서 확립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주민은 농촌총각 구제용일 뿐인가"…"미누 씨 사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법무부 스스로 표적 단속을 시인했다는 점은, 미누 씨 사건에 관심을 둔 이들이 한결같이 어이없어하는 대목이다. 미누 씨 사건이 언론에 소개되자 법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강제 추방의 이유를 밝혔다. "불법체류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미취업 상태에서 자이툰철군 반전집회, 한미 FTA 반대 집회 및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등 정치적 활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해 왔다는 게 이유다.
미누 씨 변호인이 속한 민변은 즉각 반박했다. 민변은 지난 24일 성명에서 "(미누 씨 추방이) 한국정부의 비판 세력에 대한 보복적 행위였음을 자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민변은 "미누 자신이 주최한 것도 아닌 집회에 단순히 참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활동을 주도한 것처럼 묘사하고 이주민에게는 정부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반대행위도 용납될 수 없다는 폐쇄적이고 쇄국적이며 배타적인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주노동자들과 이주여성들은 한국정부가 포장하고 있는 '다문화사회'의 이름하에 대다수 한국경제의 밑바닥 노동력으로 그리고 농어촌사회 노총각 구제용으로 활용될 뿐 한 인격체로서의 자각과 행동은 절대 금지되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도 뒤따랐다.
이주노동자 인권단체 활동가,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미누 석방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번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작정이다. 이들은 내달 초 토론회를 준비 중이며, 앞으로도 활동을 이어갈 방침이다.
미누 씨는? 1988년. 미노드 목탄(미누 씨의 본명. 이하 미누)는 한국에서 열린 '88올림픽'과 우연히 손에 잡힌 신문에 있는 '남산타워' 사진을 보고 반했다. 그리고, 1992년 2월.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처음 3년 동안 의정부 일대에 있는 식당에서 일을 했다. 사장님은 열심히 일한 미누를 위해 퇴직금을 챙겨줬다. 당시 미누는 한국어도 서툴고 한국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한국사회와 한국인은 좋은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그는 가스벨브공장, 김치공장, 봉제공장 등에서 10년 넘게 일을 했다. 특히, 봉제공장에서 여성들(대부분 아주머니들이 주로 일을 했음)과 일을 하면서 '이주노동자들도 어렵게 일하지만 한국 노동자들의 환경도 좋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일거리를 다 끝내면 다른 사람들의 잔업까지 도와주며 일을 했다. 미누는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았다. 한국가요가 좋았고, 즐겨 불렀다. 1998년, 미누는 친구와 '열린 시민가요제'에 참가해 대상을 받았다. 이후, KBS '외국인 예능경연대회'에서도 대상을 수상해 문화부장관 감사패를 받았다. 그 당시 외국인이 한국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신기함' 그 자체였고, 그는 "이주노동자 관련 행사에 참여해 이주민들에게 자신감과 즐거움, 행복을 전달하는 것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노래는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2003년 11월. 미누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10년 넘게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았는데 한국에서 나가라고 했다. 이에 분노한 이주노동자들이 성공회성당 앞에서 '이주노동자 강제 추방 반대 농성'을 했고, 미누도 농성에 뛰어들었다. 농성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여 다국적 밴드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을 결성했고, 미누도 추방직전까지 보컬로 참여했다. 2003년 12월. '스탑크랙다운'은 1집 <친구여 잘 가시오>앨범을 발매했다. 그들의 활동은 탄력을 받아 각종 행사에 초청됐다. 고 노무현대통령이 참석했던 '인권의 날'행사에서 공연, '박노해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음반' 자작곡 "손무덤" 수록, '손현숙&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 인권 콘서트', '이주노동자를 찾아 가는 울타리 없는 노래' 등 한국사회에서 묻혀졌던 다문화 뒷모습, 아픔, 사랑을 담은 미누의 목소리와 '스탑크랙다운'의 음악은 점점 퍼져갔다. 언론, 방송사, 학자들은 이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5년 시민방송 RTV의 지원을 받아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이름으로 '이주노동자의 세상'이 방송됐다. 이 때 미누는 방송에 함께 참여했고, 이주민들의 목소리와 삶을 영상에 담아 차별없는 한국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내가 만든 영상이 이주민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로 전달돼 한국인과 이주민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미누는 2007년 다문화 토크프로그램 '좋아 좋아'를 최초로 시도했다.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한국인 등)이 서로의 문화를 알아가는 프로그램으로 2008년까지 방영됐다. 미누는 다큐멘터리 <이주민 2%, 2008 대한민국>,<좋은 친구 마붑 알엄, 한국사회와 소통하다>, 뮤직비디오 <월급날> 감독을 맡았다. 미디어 활동가로서 미누는 "이주민과 한국인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 미디어라는 새로운 매체를 선택했고, 한국사회에서 이주민들에 대한 사회인식이 변했으면 좋겠다. 이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통해서 극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국에서 다문화가 중요한 의제로 떠오르면서 미누는 학교와 시민단체 등에 초청되어 다문화강사로 활동했다. 네팔 문화에 대해 소개하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문화적 편견들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는 다문화 교육을 '희망의 미래를 위한 소통'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09년 10월 9일. 미누는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파란 체육복을 입고 우리를 맞이 했다. "한국에서 말하는 희망사회 있잖아. 나는 한국에서 18년을 살았는데 그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하는지 모르겠어. 한국에서 일하고, 노래하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여기(외국인보호소)에 있잖아.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네팔에 가지 못하고 울지도 못했어. 나는…. 어제 여기서 눈물을 흘렸어. 나는 한국에서 희망조차 꿈꾸지 못하는 사람인건가? 한국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어. 내가 한국에서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었는지. 18년이라는 시간이 헛된 것이었는지. 너무 마음이 아프다. 한국이 너무 슬프다" -2009년 10월 09일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만난 미누의 말 미누는 1992년 2월 한국에 와서 20대와 30대를 보냈다. 18년을 한국에서 살고 숨쉬었다. 신문에 찍힌 '남산타워' 사진을 보며 꿈을 키웠던 그는 남산에서 산 것이 큰 행복이었다. 그런 그는 지난 8일 오전 10시 30분 경 MWTV 사무실 앞에서 연행됐다. 바로 서울출입국관리소로 넘겨진 뒤,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지난 23일, 전격 추방됐다. (이 글은 '미누 석방 공동대책위원회'가 제공한 자료에서 발췌 편집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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