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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톨레랑스'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철학자의 서재] 필리프 사시에의 <왜 똘레랑스인가?>

자아 중심성, 아이에게만?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생각 혹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의 생각 혹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자기와 타자, 내 것과 남의 것을 세밀하게 구분하면서 자기가 아닌 것,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기 자신만 소중하고 자기의 생각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우리는 '자아 중심성'이라고 일컫는다.

사람들이 자아 중심성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언제나 진실이고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아 중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남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므로 자기의 생각만이 항상 옳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기를 바라며,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의 모든 사건이나 사물, 심지어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재단하려 든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환경 세계를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쉽게 빠진다.

이러한 자아 중심성은 발달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4세에서 7세 사이의 아동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사고의 특성이라고 한다. 자아 중심성이 강한 이 시기에 어린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한다. 그림자는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를 따라 다닌다고 생각하고,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것도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하늘이 눈을 만들어 보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모든 세상 사람이 심지어 강아지마저도 게임을 좋아할 것이라 착각한다고 한다. 이처럼 자아 중심성은 어린 아이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일종의 착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아 중심성이 어릴 때 한시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른이 되서도 여전히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서 자아 중심성이 나타나는 것은 자기와 대상을 분리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나타나는 자아 중심성은 자기와 대상, 혹은 자기와 타자와의 구분을 명확히 인지하면서 자기가 아닌 것, 자기와 다른 것을 자기에게로 동일화하려는 성향에서 비롯한다. 때문에 성인의 자아 중심성은 타자와 타자의 생각을 무시하고 내 생각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면을 지닌다.

최근 부쩍 심해진 우리 사회의 좌파와 우파 논쟁, 보수와 진보의 대결, 이념 분쟁, 고정관념에 따른 탄압과 억압, 타자와 타자의 생각을 무시하는 정책, 이 모두는 자아 중심성의 핵심을 보여주는 국면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도 동의하기를 강요하며, 나와 같은 생각에, 나에게 맞추기 등이 현실적으로, 암묵적으로 강제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극복하기 위해 톨레랑스의 정신으로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왜 톨레랑스인가?

▲ <왜 똘레랑스인가>(필리프 사시에 지음, 홍세화 옮김, 상형문자 펴냄). ⓒ프레시안
'지탱하다', '참다' '참아내다' 등의 의미를 어원으로 하는 톨레랑스라는 말은 16세기 중엽 유럽에서 구교(가톨릭)와 신교(위그노)의 갈등을 배경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 신구교 간에 있었던 격렬한 갈등은 엄청난 숫자의 희생자를 만들어 냈고,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유럽의 지식인들은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일 것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톨레랑스의 탄생 배경이다. 톨레랑스가 처음 탄생한 당시에는 아직 남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개인적인 정신 자체를 의미하는 말은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공적인 소관 사항으로서 종교의 진리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탄압하지 않는 정치와 그런 정치를 실행하는 군주의 개인적 태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점차 개개인의 생각과 삶의 양식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정신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왜 똘레랑스인가?>의 저자, 필리프 사시에는 톨레랑스를 '견디다'의 의미, 즉 우리에게 지워진 부담을 견딘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톨레랑스한다는 것은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에 대해서 용인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톨레랑스란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의 의견이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용인하는 것을 말한다. 톨레랑스란 단지 무의식적 내지는 수동적으로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으로 용인하는 자세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톨레랑스는 '···을 받아들인다'는 뜻을 지닌 '용인'이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으며, 의도성을 강하게 지닌다는 점에서 타자에 대한 무관심이나 타자를 포기함과는 다른 의미이다. 톨레랑스는 나와 화합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이며,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접촉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와 혹은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톨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에선 강요나 강제 대신에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토론이 진행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타자를 강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나타날 수 없다. 치고받고 싸우거나 욕설을 주고받는 모습은 더더구나 찾아 볼 수 없다. 또 상대방을 미워하지도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고 보복하지도 않는다. 톨레랑스는 내 생각만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토론하여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 안에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누가, 어디까지 톨레랑스 할까?

이러한 의미에서 톨레랑스는 다양성, 차이가 강조되는 상황, 서로 다른 문화가 한데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매우 유용하고도 필요한 하나의 덕목이 된다. 하지만 서구에서 전적으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산출된 개념인 톨레랑스는 현재 비서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기치 않은 폭력 상황을 야기한다. 그것은 톨레랑스의 완전함을 자랑하며 톨레랑스를 비서구 사회에도 동일하게 강요하는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아직도 사회적 불평등, 빈부의 극심한 차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탄압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 서구에서 싹튼 톨레랑스의 개념은 부적절한 측면을 지니기도 한다. 아직 힘의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은 차별적인 사회에서 차이를 강조하는 방식은 자칫 차별을 은폐하고 불평등한 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 위험한 요소로 전용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차이 그 자체에 대한 가치 부여는 다양성, 다름,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고수함으로써 또 다른 한계 상황을 산출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차이나는 것에 대한 가치 부여가 대화를 보장하고 상호 소통을 보장해주기 보다는 대화를 단절시키고 오히려 더한 억압의 상황을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톨레랑스가 무한정 인정되길 바라는 것은 자칫 톨레랑스의 정신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톨레랑스해야 할 범위를 무한하게 연장할 경우, 불합리한 것, 불법적인 것, 부정의한 것에 대해서도 용납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톨레랑스의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불평등의 요소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사회에서 누가, 어떤 범주까지 톨레랑스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 된다. 사실 톨레랑스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언제나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용인한 채로 톨레랑스의 문제를 거론하기는 어려운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어디까지를 톨레랑스 할 것인가의 문제는 톨레랑스를 거론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톨레랑스의 문제는 단지 다른 것을 용인하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어느 선까지 용인할 것인가를 명확히 아는 데에 있다. 사실 톨레랑스 해야 할 범위를 무제한으로 확장할 경우, 그리고 그것을 사회의 약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으로 강조할 경우, 그것은 자칫 사회 약자들의 권익을 해치고 강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자의 충서(忠恕)가 요구되는 한국 사회

공자가, 삼아! "나의 도는 한 가지 리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라고 말하니, 증자가 "예."라고 답하였다. 공자가 나가시자 문인들이 "무슨 말씀인가?"하고 수군거렸다.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하고 말하였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한 <논어>의 구절이다. 공자는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충(忠)과 서(恕)를 말한다. 충서에 대해 송대 유학자 정이천은 "자신으로부터 남에게 미침은 인(仁)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은 서(恕)이다"라고 해설한 바 있다. 충(忠)은 中+心으로 나누어진다. 마음의 중심이 올곧게 하나 있는 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성을 의미한다. 서는 如+心으로 남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같게 보는 것,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 바꿔 생각하기의 마음이다. 타인을 나와 동등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타인을 나와 똑같이 인격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춘추시대 군자가 도덕적 의미보다는 통치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임을 떠올려 볼 때,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인 충서는 통치자, 위정자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던 실천 덕목이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며" "자기가 서고 싶은 곳에 남을 서게 해주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남을 도달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충서의 내용은 위정자가 솔선해야 할 덕목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는 충(忠)을, 남과 관련해서는 서(恕)라는 두 가지 상호 관련된 영역을 제시하는 인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충서는 내적 자기 수양에 철저하게 몰두해야 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정신을 포함한다. 군자가 행해야 할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자신에 대한 성실함과 대립하지 않는다.

군자는 타인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또 타인의 처지를 잘 헤아리며 타인에게 강제성이나 억압성을 띠지 않아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위정자는 정치를 행함에 있어서 자기 아집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타인의 의견과 주장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자기 신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유연성을 가져야 하며, 또한 자기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모름지기 군자란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확신할만한 것을 추구하여야 하지만 그것을 남에게 강제하지는 않아야 한다. 군자는 명령하는 자가 아니라 몸소 보여주고 넌지시 제안하며 매력으로 이끄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 남을 강제하여 나에게 맞추도록 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바로잡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남을 배려하는 것, 타자와 타자의 생각을 용인하는 것이 통치자가 우선적으로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군자의 충서는 한국 사회에서 누가, 어느 범주까지 톨레랑스할까를 고민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톨레랑스는 궁극적으로 누구나 행해야 할 덕목이지만, 힘의 불균형이 아직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그냥 톨레랑스가 아니라 통치자와 가진 자가 솔선하는 톨레랑스, 군자의 충서가 더 시급하게 요청된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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