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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의사들이 모인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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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의사들이 모인 진짜 이유는?

[의학사 산책] 의사들의 단체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면 단체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단체는 서로의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며 각자의 발전을 도모한다. 의사들의 경우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필요가 어느 분야보다 더 절실하여 이러한 단체의 필요성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일본인 의사들의 단체

▲ 경성의사회의 1908년 봄 총회 기념. ⓒ동은의학박물관
개항 이후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의사들은 통감부가 설치되고 한국이 곧 자신들의 식민지로 될 분위기가 농후해지자 발 빠르게 의사 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1905년 7월 당시 서울에서 개업하고 있던 일본인 의사 7명이 조직한 경성의사회는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이해를 대변할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비록 일본 거류지의 의사(醫事), 위생을 담당할 것을 자신들의 목적 중 하나로 규정했지만, 과다한 경쟁이나 약가 인하를 막기 위해 약가 규정을 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요한 목적은 개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일본인 개업의들만 아니라, 일본의 대외 침략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인회 소속의 의사들, 조선에 파견된 군의, 통감부에서 설치한 의료 기관에 근무하기 위해 파견된 의사 등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일본인 의사들을 총괄한 단체가 만들어졌는데, 1908년 10월 28일 만들어진 한국의학회였다.

한국의학회는 일본인 의사들을 조직화함으로써 통감부가 집행하고자 하는 각종 의료시책에 도움을 받고자 결성되었다. 회장에 대한의원 부원장, 부회장에 한성병원장과 육군 1등 군의정, 평의원에 대한의원 기사 등 11명이 선발되었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일부 한국인 의사들도 참가하였다.

한국의학회는 "경성 및 용산에 거주하는 의사로 조직"된 단체였으며, "의학 연구 및 의사, 위생의 진보"를 그 목적으로 삼았으며, 매년 4회에 걸쳐 학회를 개최하고 학술지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학회회보>는 1909년 4월 5일 제1호가, 1909년 12월 5일 제2호가 간행되었다.

의사연구회

▲ 의사연구회 관련 기사(1908). ⓒ동은의학박물관
일반적으로 한국인 의사들의 단체로 처음 결성된 것으로 알려진 의사연구회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의학교 교관을 역임하고 군의로 근무하고 있던 김익남이 서울 안팎에서 의업 활동을 하고 있던 인사들과 함께 1908년 11월 8일 모여 만든 단체였다.

이 연구회의 조직은 5월경 신문에 보도된 이후 꾸준히 진행되었는데, 11월 15일 김익남이 회장에, 안상호가 부회장에, 유병필이 총무에, 최국현, 장기무가 간사에 피선되었다. 또한 찬성원으로 외국 의사를 추천키로 예정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사연구회의 활동을 보면 1909년 3월 1일 기근 구호를 위해 기금을 걷었으며, 1909년 4월 19일에는 의사법의 공포를 내부에 건의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특별한 성과 없이 1909년 5월 경 해산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모임의 성격에 이상한 점이 있다. 우선 같은 해 6월에 한국 최초의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제중원의학교 졸업생들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관립의학교 졸업생인 홍석후와 홍종은마저 이 연구회에 참여하고 있지 않고 있다.

또 하나, 찬성원이라는 제도를 두어 의사가 아니어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고, 찬성원과 그 가족들에게 병이 생기면 회원 의사를 보내 무료로 치료하기로 했던 점이다.

경술국치와 조선의학회의 설립

▲ 조선의학회 제1회 학술대회(1911)의 참석자들. ⓒ동은의학박물관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의사들 단체에도 변모가 모색되었는데 군의들이 중심이 되었다. 육군대신이던 데라우치의 총독 임명은 물론, 조선주차군 군의부장이던 후지타(藤田嗣章)가 조선총독부의원장에 임명되었고, 군의들이 전국에 설치된 자혜의원의 책임을 맡았다.

새로운 단체의 구체적인 창립 준비는 총독부위원장 후지타에 의해 제기되었고, 위원장으로 후지타, 창립위원으로 9명이 위촉되어 1911년 4월 29일 조선의학회가 창립되었다. 서울 지역의 단체였던 한국의사회에 비해 조선의학회는 조직 범위를 전국적으로 확대한 단체였다.

1911년 제1회 총회가 열린 이후 매년 정기총회를 통해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공간을 마련하였고, <조선의학회잡지>를 기관지로 정기적으로 발간하였다. 자신들의 치료 및 연구 활동을 조선의 식민화와 영구적 지배라는 국가적 목표와 연결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한성의사회

1915년 12월 1일의 19명으로 창립된 한성의사회도 (관립)의학교 졸업생을 주축으로 창립되었는데, 안상호가 회장에, 박종환이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후에는 신필호 등 다른 한국인 의사들도 일부 합류하였다.

한성의사회는 기본적으로 서울에서 개원하는 의사들의 친목, 이익 단체였지만 전염병이 돌거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회원들이 나서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무료로 예방 접종을 했고, 1925년 서울 근교에 큰 수재가 발생한 후 환자들이 생기자 무료 진료에 나섰다. 1927년에는 영흥에서 일어난 에메틴 사건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성의사회는 창립 이후 일본인들이 만든 경성의사회와 합병론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어 오다가 1927년의 에메틴 사건에 적극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일제는 해산을 위해 갖가지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다음에 설명할 조선의사협회가 해산된 후인 1941년 11월 강제로 해산 당함으로써 이후 광복까지 한국인 의사 단체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한성의사회 좌담회 기념(1933).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조선의사협회

한국인들이 전국적 규모의 만든 첫 단체는 1930년 창립된 조선의사협회였다. 이 협회는 1930년 2월 21일 윤일선, 이갑수 등 당시 교직에 종사하던 의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브란스의전 강당에서 발족되었다.

이 단체는 의사연구회와 달리 세브란스의전과 경성의전, 경성제대 의학부의 한국인 교수들이 골고루 참가했고, 일본인들의 조선의학회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회지인 <조선의보>를 창간했다.

한국인 의사들로 구성된 조선의사협회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활동을 방해하고 질투와 시기를 일삼아 오던 일제는 1939년 가을 이용설이 한국 대표 자격으로 태평양외과학회에 다녀온 사실을 구실로 조선의사협회를 해체하고 말았다.

조선의사협회와 한성의사회를 강제로 해체시킨 일제는 1942년 12월 조선의사회란 관제 어용 의사회를 중앙에 조직하고 도마다 도의사회를, 중요 도시에는 지부를 설립하도록 조치했다. 조선의사회는 발족 후 아무런 실적도 없이 존속되다가 1944년 8월 새로 제정된 의료법령에 의해 관제 어용단체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회칙개정 내용, 임원선임 문제 등 중요안건은 총독부 의무국 위생과의 방침에 따라 좌우됐다.

해방 이후의 의사 단체

해방이 되자 8월 17일 개원 의사들은 건국의사회를 조직했고, 9월 19일에는 의대 교수들이 조선의학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단체의 난립으로 다소 혼란이 있었지만 1947년 5월 10일 한국 의사들을 대표하는 중앙의사단체인 조선의학협회로 새로 탄생하였다.

조선의학협회는 대한민국 의사를 대표하는 중앙의사단체로 창립된 지 1년 후인 1948년 5월 10일 협회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9월 대한의학협회로 개칭하였다가 1995년 5월 대한의사협회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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