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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극복을 말하는 '찌질한' 장애 사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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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극복을 말하는 '찌질한' 장애 사회여!"

[철학자의 서재] 김도현의 <장애학 함께읽기>

장애 사회에 던지는 돌팔매질 하나

십 몇 년 전에 어떤 잡지에서 아름다운 사진을 보았다. 갈색 고수머리에 선굵은 이목구비를 가진 프랑스 청년이 모델이었다. 겨울 메마른 나무들과 함께 나신으로 서있는 그는 마치 나무와 한 몸, 나무의 또다른 굵은 가지처럼 보였다. 멀찌감치 도심 속 스케이트장을 배경으로 찍은 상반신 사진에서 그는 '짧은' 손으로 담배를 물고 눈썹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얼굴 한쪽으로 산란된 도시의 푸르스름한 빛으로 해서 더욱 몽환적으로 보였다.

사진작가는 우리나라 출신의 수지 장(Suzi Chang)이라는 이였고 모델의 이름은 자비에(Javier). 그는 지체장애인이었다. 왼 팔은 아주 짧았고 오른 팔은 길었지만 두 손 다 손가락이 온전하지 않았다. 다리는 천으로 가려서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찍은 사진작가는 그를 보고 '초현실적인 동시에 가장 자연과 가까운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했다. 패션 모델이 되고 싶다는 비밀스런, 그러나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소망을 갖고 있던 그의 아름다움을 사진기의 눈이 알아보았던 것이다.

표준화된 인간 체격을 갖고 있지 않은 어떤 인간을 보고서, 이성의 여과 과정 없이 즉각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짧은 팔, 굵게 갈라진 손가락, 억세 보이는 어깨는 나무들과 어우러져 존재는 존재 자체로 자연스럽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몇 년 전에 나는 또 잡지에서 매우 인상적인 사진을 보았다. 고엽제 환자들을 찍는 베트남 사진작가 도안 득 민의 사진 작품들이었다. 그 사진 속에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한 경우의 장애인들이 있었다. 평생을 우리에 갇혀 살고 있는 처녀도 있었고 심지어는 눈도 코도 없이 태어난 아이도 있었다.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그들을 보면서, 물론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눈을 돌리지 않고 사진을 천천히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비로소 '행복한 찰나'(기사 제목이기도 하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장애의 처참함을 알리기 위한 고발사진, 혹은 '고통감상용' 사진이 아니었다. 사진 작가 스스로의 말대로,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고단한 일상 속에서 반짝반짝하고 빛나는 행복한 찰나들, 그 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진이 이끄는대로, 그들이 눕거나 앉아있는(때로는 갇혀있는) 장소나 그들의 생김새와 무관하게 삶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스크랩하는 꼼꼼한 취미가 있었던 게 아니었음에도 어쩐 일인지 이 두 기사는 아직도 플라스틱 파일에 넣어 책장 한 켠에 보관되어 있다. 이 사진들은 장애를 바라보는 나의 눈을 단번에 바꿔준 '사건'이라고 할 만한데, 그것은 내 삶이 장애 문제와 무관치 않은 것이 되었다는 '우연'과도 관련있다.

요컨대 두 건의 사진에서, 나는 장애란 본질적으로 당사자 개체의 존재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구나, 그것은 철저하게 그의 '외부', 곧 사회의 문제구나 하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그어서 장애가 도드라지게 만드는 실체는 장애 당사가가 아니라 바로 장애에 대한 고려 없이 멋대로 구성되고 운영되는 몰염치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가 처한 사회의 조건에 따라 그의 장애는 장애가 아닐 수도, 심하게 불편한 장애일 수도 있게 된다. 비꼬아서 말하자면, '비장애인들의 장애적 사회'가 본질적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는 장애인을 전염병 환자 취급을 하던 아주 저열한 단계에서 겨우 벗어나 억지로라도 우아하게 '불쌍하니까 좀 봐주자'고 하는 단계를 느릿느릿 지나고 있었으니, 장애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요라고 외쳐봤자 아무런 반향이 없었던 것이다. 2000년 들어서야 장애인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몸을 던져 투쟁하면서-일테면 스스로 쇠사슬로 묶고, 강물에 뛰어들고, 질질 끌려가고, 휠체어채로 들리고, 비닐 속에서 찬비맞아 가면서-비로소 장애의 본질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적지않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해왔고, 일련의 장애 운동의 기반에 이미 그런 사회의식이 담겨 있거나 혹은 담으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장애 극복을 말하는, 너무나도 찌질한 장애 사회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사회가 장애에 관해서 얼마나 찌질한 사회인지 떠들어 보자. 왜 찌질하다고 하냐면 저열함을 감추기 위해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데, 그 포장지가 너무 천박하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아직도 장애인의 집단 거주지가 있다. 시설이라고 하는 곳이 그것인데, 가끔 비인간적 운영 실태가 보도되곤 한다. 그런데 언제나 사건은 운영자와 관리자의 개인 비리, 그것에 대한 분노, 그걸로 끝난다. 장애인들을 왜 그런 시설에 격리 수용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같이 살아나가려면 이 사회의 구조가, 사회 구성원의 생각과 매너가 바뀌어야 하는데, 바로 그 비용 감당이 싫어서다. 시설에 두면 일단 내 눈앞에서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이 없어도 되고, 그렇게 되면 장애는 오로지 장애를 가진 자, 그들만의 문제에서 멈춘다. 그래서 장애 운동 하는 사람들은 '탈시설'을 외치지만, 비장애인들은 두려워한다. 왜 나오려고 해? 그냥 그 속에서 편하게 살아, 걸리적거리지 말고, 이렇게 말이다.

간혹 기특하게도 어떤 종류의 장애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주목하는 장애인들은 대개 스스로의 장애를 극복하고(혹은 부모가 극복시키고) 비장애인에 근접한 기술과 기능을 익힌, 의지의 인물들이다. 그래서 장하다고 상도 준다. 여당 국회의원도 장애극복상이라나 뭐라나를 만들어서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을 국회로 초청해서 행사를 벌였었다. 그 행사 주체의 하나인 나모라는 의원도 장애아의 부모였다는 점에서 어이가 없었다.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들은 누구도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정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장애인 살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회이지 장애를 가진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를 극복하라는 말은, 장애가 곧 자기결함이라고 인정하라는 윽박지름과 같다. 장애인이 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장애를 극복해내야 하는가. 이런 기본적인 의문도 갖지 않았었다는 말이니, 이는 장애부모의 임무와 사회인의 책임 둘 다를 저버린 것이다.

비장애인들이 자기들만의 출발선을 그어놓고는 바로 거기서부터 자기들은 출발하면서, 장애인한테는 그 출발선까지 가는 게 목표여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왜 자기조건을 극복하고 이른바 일반인(그들만의 표준인을 말하는 것이겠지)처럼 살기가 목표여야 하는가 말이다. 이래서 웃긴다는 말이다. 그 인간 표준이라는 거. 낡아빠진 우생학적 발상 아닌가. 상품성에 미달되니 솎아내고자 하는. 비장애인들의 출발선까지 가기 위해 장애인들은 자신의 존재와 무관한 헛땀을 쏟아야 한다.

나는 그것은 비본질적 노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 존재를 풍요롭게 하는 일과 상관없는 허상의 포장을 위한 헛땀 말이다. 금칠 범벅한 고층 빌딩이 강줄기를 차고 세워질 때, 수초 우거진 아름다운 강변이 시멘트 길로 메워질 때, 밤새도록 현란한 조명이 한강다리에서 번쩍일 때, 아, 삶의 터전이던 온 나라가 저들의 돈놀이와 유원지로 변해 가는 것을 볼 때, 그것들을 위해 내 땀과 내 수고가 얼마라도 쓰였구나 하고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바로 그게 비본질적 노동이 아닌가. 장애인들에게 자기 조건을 극복하고 표준화된 이 사회에 적응해서 네가 해야 할 몫의 노동을 하라는 것도, 바로 그 헛땀을 강요하는 셈법에서 나온 것이다.

▲ <장애학 함께 읽기>(김도현 지음, 그린비 펴냄). ⓒ프레시안
다소 감상적인 이러저러한 내 소박한 장애관(이라고 말하니 좀 쑥스럽기도 하지만)이 바야흐로 '이론 학습'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기회를 가졌다. 김도현의 책 <장애학 함께읽기>를 접하면서 장애학이라는 분야가 따로 있으며 그것은 여성학처럼 여러 분과를 통섭하는 학제적 의미를 갖는 분야로 있어야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애 자체에 대한 논의가 사회복지학, 특수교육학, 의학 내에 분산되어 있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도 장애 문제가 체계성을 갖고서 논의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늦었지만 이론적 기반과 실천운동의 기반을 제공하는 독립적 체계로서 장애학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때이다.

저자는 장애운동 현장에서 열성적인 활동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활동이 꼼꼼한 책읽기의 학습에 바탕을 두고 일정한 이론적 기반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는 게 이번 저작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할 일 많은 장애운동가로서 그 바쁜 중에 이론을 공부하고 저술까지 했다는 부지런함에 우선 박수부터 칠 일이다. 사실 그는 이미 <차별에 저항하라>(박종철출판사 2007),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 등의 책에서 우리나라 장애운동의 현실과 더불어 장애이론을 소개했었다.

이번 책은 그 과정에서 다소간 전문적이어서 소략하게 넘어갔던 장애학 이론을 깊이있게 다루고자 한 것이다. 다만 '깊이있게'라는 데 너무 방점이 찍혔던 게 아닌가 싶은데, 그의 친절했던 전작들에 비해 엄청나게 어려워진 글투와 내용이 읽기에 여간 부담이 되었던 것이 아니다. 글머리에 스스로 밝힌 바대로, '진보적 장애인운동과 장애학'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교재로 쓰일 발제용 원고를 가지고 집필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엄청나게 진지한 세미나였던 듯싶다.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경중을 따지지 않은 수많은 인용들을 이해하는 데도 요령부득이었던 '평범한' 독자인 나로서는, 문장 하나하나마다 머릿속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입말로 다시 재구성해가면서, 또는 가지치기해가면서 미련한 독서를 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다양한 사회적 분할들에 의한 동시적 억압의 담지자로서의 개인에 대한 확인, 즉 개인의 전체성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합니다'라는 식의 문장이 이어질 때는 독해력과 더불어 깊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저자를 수없이 원망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공부가 되었기에 책을 접으면서 그를 흘겨볼 생각도 같이 접긴 했다.

장애인에게 적대적인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는 장애해방세상이란

지은이는 진보적 장애운동가임을 자임해 왔다. 이것의 출발선은, 장애는 장애인 당사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라는 데에 있는데, 이는 내가 가졌던 소박한 초창기 깨달음과 같은 것이며, 아마 장애운동에 관심을 두게 되는 이라면 대체로 공감하는 내용이다.(참고로 사회적 장애이론이 채택하고 있는 장애에 대한 정의는, '손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거의 또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사회활동의 주류적 참여로부터 배제시키는 당대의 사회 조직에 의한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한'이다.) 당연히 결론은 사회변혁일 수밖에 없다. 그가 생각하는 진보적 장애운동이란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진보적 장애운동이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규정하는 체제의 문제와 정면으로 대면하여, 그러한 체제를 넘어서는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평등과 차별 철폐를 달성하려는 지향을 지닌다 (…) 진보적 장애인 운동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넘어, 상식 자체를 바꾸어나가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그래서 그는 결국 "이는 비장애인이 지금까지 건설해 온 문명 가운데 장애인에게 가장 적대적인 문명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는 과정을 불가피하게 거쳐가야만 한다."라고 말하게 된다.

이번에 낸 그의 책 <장애학 함께읽기>는 이런 바탕생각을 구성하기까지 그가 학습한 '장애와 장애 문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분석' 을 정리한 것이다. 전반부는 주로 장애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이며 장애는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억압적 상태라는 '사회적 장애이론'을 기본으로 해서 장애학을 정리했다. 특히 영국의 사회학자 올리버의 <장애의 정치>(1990)의 내용이 중심이다. 올리버의 사회적 장애모형에 기초한 사회적 장애이론에 저자 역시 자기 이론의 많은 준거를 제공받고 있는 셈이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사회적 장애이론의 기본적 이해를 돕기 위해 장애학의 성격, 등장 배경과 발전 과정, 사회적 장애이론의 주요 논점과 논쟁들을 다루고 2부에서는 지구화, 노동, 장애정치라는 것을 큰 주제로 이론상의 여러 쟁점들을 소개하였는데, 여기서는 저자가 올리버의 충실한 번역자에서 벗어나 비판적 수용을 꾀하고 있음이 보인다.

특히나 '장애와 노동'을 다룬 부분에서 소개된 영국의 장애학자 애벌리의 주장은 인상깊다. 그는 '노동을 통한 사회 통합이 아니라 노동을 전제 조건으로 하지 않는 사회 통합'을 주문하는데, 그 사회는 '생산력주의나 경제주의로부터 벗어난 사회, 그래서 노동의 과정에 의미 있게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노동을 보장하고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노동적인 삶을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장애 해방 사회를 말한다.

물론 노동중심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체제가 현실적인지에 대한 반론도 당연히 있다. 이에 관해 저자는 애벌리의 주장과 함께 이진경, 울리히 벡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대안적 노동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장애인의 사회 통합을 논의할 때 그 기본이 되는 것이 노동활동임을 염두에 둔다면, 새로운 노동관은 매우 중요한 의제임이 분명하다.

장애학과 장애정치가 넘쳐나는 세상을 위하여

사회변혁을 꿈꾸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더구나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가 대증적(對症的) 치료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근본인 몸통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복지의 확대, 권리 쟁취의 문제와 같은 운동 전략 못지않게 그 스스로 장애 현실을 만들어내는 주체인 사회를 엄중히 소환하여 따지고 변혁을 요구해야 하는 때다. 그런 점에서 장애사회에 대해 여러 각도, 여러 분야의 연구가 진행되어야 마땅하며, 그 중심에는 장애학이 독립학문으로 위치해야 한다. 현장 활동가의 입장에서 꼼꼼한 학습노트를 만들어가고 있는 일은 그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물론 장애해방 세상의 절대조건으로 그가 내세운 반자본, 새로운 노동관 등과, 장애정치를 말하면서 밝힌 연대의 소망 같은 것들이 얼마나 통일적이고도 정치한 이론과 현실성 있는 실천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또 신자유주의의 한계가 화두가 되고 있는 지금, 신자유주의 사회 정책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제 어떤 비전을 향해 갈 것인지도 궁금하다. 그러나 이 의문은 그에게 물을 일이 아니라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 모두와 같이 묻고 대답해 갈 일이겠다.

경쟁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인 것처럼 미쳐 내달리는 이 시대 이 땅에서, 내 몫 불리기로는 남의 것 빼앗아 이루는 걸 가장 쉬운 길로 믿고 있는 이 뻔뻔한 사회에서, 장애인 문제는 다른 여타의 복지, 인권문제하고 한덩어리로 더럽고 치사한 구걸처럼 되어버렸지만, 그러기에 더욱 그와 우리 모두는 그 이론의 바탕과 운동의 각론에 대해서 곳곳에서 입에 거품 물어가면서 난장을 벌어야 하고, 띠를 두르고 나서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정말로 장애는 장애인 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내 정체를 밝히는 발언을 해보자면 이렇다. 아들아, 너는 문제없어. 네가 살기 불편하다면 그건 네 문제가 아니라 아직 덜돼먹은 이 사회가 문제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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