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반부터 의학 박사가 배출되기 시작하면서 학술 활동이 활발해졌다. 1930년대에 들어 조선의사협회를 중심으로 조선의보가 간행되어 한국인 학자들의 학문의 장이 마련되기도 했지만, 일제 시기라는 특성과 아직 전문 인력이 많지 않았던 탓에 한국인들이 주축이 된 전문 학회의 창립은 요원했다. 다만 일부 한국인 교수들이 일본 전문학회의 평의원으로 추대되는 것으로 만족해해야 했다.
의학 교과서의 편찬
▲ 공병우의 <신소안과학>. ⓒ동은의학박물관 |
1910년대에는 선교사들이 편찬한 얇은 소책자들이 일부 교육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의학전문학교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일본인이 저술한 책들이 교과서로 추천되어 사용되었다. 이 책들은 일본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것들이었다.
일제시기에 한국인이 저술한 의학 서적은 거의 없는데, 공병우가 일본어로 저술한 <신소안과학>이 눈에 띌 뿐이다.
해방 이후에는 김명선의 <생리학 강의> 등 극히 일부의 교과서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교과서가 편찬되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 외국에서 발간된 원서들이 국내에서 복제되어 소위 '해적판'이란 이름으로 유통되었다. 원서에 비해 가격이 쌌기에 학생들이 구입하기 쉬웠고, 따라서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해적판'의 출판이 금지되면서 1990년부터 한국어로 쓰인 교과서의 출판이 활발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추천 도서 이마다(今田束)의 <실용해부학>, 오사와(大澤岳太郞)의 <조직학 강의>, 누카다(額田豊)의 <의화학>, 야마다(山田薰)의 <생리학 정해>, 후나오카(丹岡英之助)의 <신생리학>, 이노우에(井上善次郞)의 <의약 소책자>, 이노우에의 <의약>, 기타사토(北里紫三郞)의 <병리학>, 기타사토(北里紫三郞)의 <실용 세균학>, 모리(森鷗外)의 <신위생학>, 시모히라(下平用彩)의 <진단학>, 시모히라(下平用彩)의 <일반 외과학>, 시모히라의 <외과학 각론>, 사토(佐藤勤也)의 <실용 부인의학>, 미츠와(三輪信太郞)의 <소아의 질병>, 오가와(小川劍三郞)의 <눈의 질병>, 이타타(岩田一), <요시기(吉井丑三郞)의 <이비인후과학>, 구레(吳秀三)의 <신경학과 정신의학>, 도히(土肥慶藏)의 <피부병학> |
의학 잡지의 발행
의학 잡지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잡지에 실을 원고가 있어야 하고 이를 구독할 독자가 있어야 한다. 또한 많은 경우 의학 연구를 위한 학회가 결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인 스스로 의학 잡지를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든 일본인들은 재빠르게 의사단체를 만들어 잡지를 발행하였다. 1908년에 간행된 <한국의학회지>(1908~?)와 <조선의학회잡지>(1911~43)가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인 의사들은 자신이 진료했던 환자에 대한 경험을 보고하였고, 후에는 의학교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 결과를 이 잡지에 실었다.
한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발행된 잡지는 1930년에 창간되어 1936년까지 간행되었던 <조선의보(The Korean Medical Journal)>였다. 한국에서 의학교 첫 졸업생 혹은 첫 면허 의사가 배출된 지 한 세대가 지난 후였다. 각 호에는 원저와 종설이 실렸다. 뒷부분에는 회원들의 동정이 실려 있어 의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 <한국의학회지>(1908)와 조선의학회잡지>의 창간호. ⓒ동은의학박물관 |
일제시기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대구의학전문학교에서 잡지를 발행하였고, 특히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는 <임상내과학>, <임상외과>, <성대소아과잡지> 등이 발간되었다.
이외에도 <의학월보>, <만선지의계>, <선만지의사>, <가정위생>, <Korea Mission Field> 등의 잡지가 발간되었다.
해방 후에는 의사들의 중심단체인 의학협회에서 잡지가 발간되었으며(<조선의학협회회보>·<대한의학협회회보>·<대한의학협회잡지>·<대한의학협회지>·<대한의사협회지>), 의학회에서는 1986년부터 영어 잡지(Journal of Korea Medical Science)를 발간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의사신보>(1946), <조선의학신보>(1946), <조선의보>(1946), <국립보건연구원보>(1947), <전북의보>(1948), <임상의학>(1949), <대한내과학회잡지>(1949) 등이 발간되었다.
▲ 한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간행된 <조선의보>의 창간호 표지(1930)와 총목차. ⓒ동은의학박물관 |
한국 전쟁 이후에는 군진의학 관련 잡지의 발생이 눈에 띄며, 다음으로 전문 출판사에서 발간된 <의학(병리와 임상)>(1954), <종합의학>(1956), <의학다이제스트>(1958), <최신의학>(1958), <한국의약>(1958), <중앙의학>(1961) 등의 잡지들은 1960년대 각 학회에서 전문 학술지들이 발간되기 시작했음에도 한국 의학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다.
군진의학 관련 주요 잡지 <의성>(1951), <육군의무장교단잡지>(1954), <항공의학>(1953), <의학>(1953), <해군의무단잡지>(1956), <군진의학>(1961), <육군의무기술>(1962), <대한군진의학>(1961), <대한군진의학협회지>(1974) |
일제 강점기 의학 연구
관립의학교들은 일제의 후원 아래 교실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특히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는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른 관립이나 사립 의학전문학교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설비를 갖추었고 연구 인력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미생물학 교수인 시가 기요시(志賀潔)와 같이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진 학자가 일찍부터 파견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사립 의학전문학교의 경우 연구 여건이 모든 면에서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1914년 여러 과가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연구부를 만들었다. 연구부는 설립 초기에는 문자 그대로 연구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기초학의 여러 교실을 비롯하여 각 과들이 분화되어 연구 활동을 진행함에 따라 초창기에 가졌던 연구 조직으로서의 성격은 연구 지원 조직으로 바뀌어갔다.
당시에는 연구비를 주는 기관이 없어 세브란스의 아들인 존 세브란스와 딸 프렌티스가 매년 300원 정도를 연구 활동에 지원했다. 연구부 설립이후 1942년경까지 250건 이상의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300편 이상의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 <조선의학협회회보>와 <Journal of Korea Medical Science>의 창간호 표지. ⓒ동은의학박물관 |
일제 시기의 의학 논문
▲ 세브란스 연구부에서 연구비를 지원 받은 논문(제1번, 1915년). ⓒ동은의학박물관 |
이후 1930년대에 들어 의학 박사를 받는 한국인들이 많아지면서 자연 발표된 논문이 많아졌을 뿐 아니라 분야도 다양해지고 연구 내용도 점차 전문적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연구 결과가 소위 'SCI' 잡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 주인공은 1928년 세의전을 졸업하고 윤일선 교수의 지도로 연구를 하고 있던 백태성이다. 그의 논문인 <부갑상선호르몬과 쥐의 육종의 성장 사이의 관계(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arathyroid hormone and the growth of rat sarcoma)>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저명한 'SCI' 잡지인 <미국암학회지(American Journal of Cancer)>(1931)에 게재되었다.
이상과 같이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손으로 잡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것이었고 대외적으로 내세울만한 특별한 연구 업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방이 된 후 우리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한국 의료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한국인 교수가 대다수였던 세브란스의 역할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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