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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기고] 정태춘·박은옥 30주년 기념 콘서트에 부쳐

대추리에서
- 정태춘·박은옥 30주년 기념 콘서트에 부쳐

포크레인 삽날이 황새울을 도굴하며
커다란 흙무덤들을 파고 있을 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고 쓴
프랑을 둘둘 말아들고
헉헉거리며 그가 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뛰어 들어
이 프랑을 펼치는 거야 라고 그가 속삭였다
그는 한번도 아티스트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참 푸르던 날

우리도 함께 묻으라며
흙무덤으로 우리가 몸을 던지자
뒤따라 전경 수십 명이 우리를 덮쳐 왔다
그때 그가 저 끝에서 소리쳤다. "목을 걸어!"
그는 벌써 프랑 한 끝으로 자신의 목을 동여매고 있었다

사람들이 진짜 죽는다고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우리는 아무렇게나 흔들고 가는 굴비두름처럼 프랑에 목이 대롱대롱 묶인 채
컥컥거리며 끌려나와야 했다
한반도의 모든 비와 바람과 꽃잎과 구름의 마음을 섞어도
그 소리가 나올까 말까 한
박은옥이 이럴 수가 있냐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끝내 프랑을 놓지 않고 끌려갔다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것이 어떤 노래보다 감격스러웠다
그렇지. 너희들은 그렇게
칠레에서 빅토르 하라의 손을 잘랐지
가슴에 구멍을 뚫었지
아르헨티나에서 메르세데스 소사를 내쫓고
그리스에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를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지
우리에게서 서정을 뺏어갔지

'서해 먼 바다 위로 노을이
비단결처럼 고운 날'이었다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던' 어둔 날들이었다
'아버지는 일 나가고
아이들만 집을 지키던' 날들이었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비둘기 한 마리'만 외로이 날던 날들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광장에서눈물을 흘리지 말자'고'물대포에 쓰러 지지도 말자'고'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다시 일으켜 세우자고 울부짖던 날들이다

그후 그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노래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노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린 이제 그들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
우린 이제 그들이 노래했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짓밟혀 가는
이 세계의 문을 닫아야 한다
그들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다면
우리의 가슴에 먼저 불을 놓아야 한다
우리의 목을 먼저 걸어야 한다

정태춘·박은옥 선배가 오랜만에 콘서트를 연다고 한다. 5년 6개월만이라고 한다.

다시 또 끌려나온 자리인 줄을 안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아."
"노래가 무슨 힘이 된다고."
몇 년 사이 그들은 한사코 노래하기를 마다했다.

그런 그들의 노래를 다시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많은 날을 여러 사람들이 설득했다고 들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쓸쓸해져 가는 우리 시대에 대한 사랑. 진정한 예술에 대한 사랑. 우리 이웃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작지만 깊은 사랑의 마음들이 그들로 하여금 다시 무대에 서게끔 했다.

대추리에서 그들은 우리들의 대책없는 대장이었고 따뜻한 누이였다.
대추리 투쟁이 끝난 후 우린 모두 쓸쓸해졌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를 위해 싸우다 패배하고 대추리를 떠나오던 마지막 날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우린 그날 우리 손으로 황새울에 세웠던 최평곤 형의 <들지킴이>에 석유를 끼얹곤 불태웠다. 대추리에서 너희들이 파괴한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길이길이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 인천 산동네 '기차길 옆 공부방' 아이들이 와서 그려놓은 벽화 한쪽은 떼어 인근 농협 창고로 실어 날랐다. 대추초교 운동장에 언젠간 다시 돌아오리라는 소망과 약속의 타임캡슐을 눈물로 묻었다. 마지막으로 평화동산에 세워두었던 <파랑새 소녀>를 평택호 쓸쓸한 공터로 옮겨 주었다. 빛 하나 없는 평택호에 <파랑새 소녀>를 세워두곤 서러워 흘린 눈물만큼 찬 소주를 들이키기도 했다. 어디로도 갈 곳 없는 마음들이 평택역 뒷골목 시장 좌판으로 어디로 몰려 다녔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우리는 대추리로 다시 돌아와 이젠 무너져가야 할 빈 집들의 세간들을 내어 불태우며 빼앗긴 들에서 밤을 새웠다.

▲ 2006년 2월, '황새울의 날'에 참가한 '들사람들'이 '비닐하우스 콘서트'에서 단체인사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그 후로 3년여.

그들은 밖으로도, 거리로도 잘 나오지 않았다.

기륭비정규 투쟁을 하며,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며, 용산과 함께 하며 나는 때때로 필요에 따라 그들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그들의 노래보다 그들의 대중성과 인지도가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뼈아픈 호명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곧잘 그들의 상처를 헤집곤 했다.

"봐줘. 경동이. 나의 노래는 이제 힘이 안돼."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싶진 않아. 근본적인 싸움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갈게. 그때 불러줘."

수십 년 동안 늘 소모적인 일들로, 도구적으로 쓰임을 당한다는 것이 문화예술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를 모르는 바 아니기에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사랑했던 속칭 386들은 모두 변해갔고, 노동자민중들은 시대의 주체로 서지 못했다. 미완의 87년은 자기 갱신을 통한 재도약으로 가지 못하고, 오히려 거덜나 시대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시대의 시궁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그들은 이런 시대의 혼탁한 공기를 참지 못하는 여린 새들. 잠수함의 토끼들이었다. 아직 꺾이지 않은 푸르른 싹들이었다. 타협이 불가능한 양철북들이었다. 갈리아의 수탉이며, 아직 어린 모모들이었다. 아직 꿈을 접지 못한 로맨티스트였고, 오지 않은 세계를 아직도 꿈꾸는 몽상가들이었다. 부조리한 세계와 화해하지 않고 불화하기 위해 제 노래를 접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술가들이었다.

그런 문화예술인들이 이젠 많지 않다.

시대의 짠 소금으로, 신선한 대기로, 고독한 피뢰침으로 외롭게 서 있어야 할 문화마저 어느새 모두 상품이 되어버리고 만 이 쓸쓸한 시대에 아직 그들이 있다는 것이 따뜻하다. 소비되는 노래, 소비되는 시가 되지 않기 위해 노래를 멈춘 그들의 고통이, 완고함이 나의 폐부를 자르듯 아프지만 향기롭다.

하지만 그들의 노래는 그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귀한 자산이었다.

이젠 우리가 다시 그들에게 사랑을 나눠주어야 할 시간이다. 그들의 노래가 지난 30여 년간 우리에게 사랑을 나눠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참 부족하고 늦은 일이다. 우리가 정태춘/박은옥을 기억하는 일은, 때로 우리의 시대를 우리 스스로가 지키고 사랑하는 일의 한 가지가 될 것이다. 그들의 노래는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좌절과, 우리의 꿈을 노래해 주었다. 이제 다시 우리들의 노래를, 시를, 그림을, 조각을 되찾아야만 한다. 가수가 목을 걸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화가와 시인이 죽봉을 들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우리는 다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그 가수가 다시 우리 시대의 소외된 이들을 위해 노래할 수 있도록,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해 줄 수 있도록 우리가 이젠 그의 다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절망하지 말아야 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 정태춘·박은옥 30주년 기념 콘서트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 때 : 2009년 10월 27일(화) ~ 11월 1일(일), 평일 8시, 토·일 5시
- 곳 :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 공연장 옆 '경향아트 갤러리'에서는 정태춘·박은옥 트리뷰트 미술전 <다시 건너간다>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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