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는 남자? 여자?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는 남자? 여자?

[의학사 산책] 각 분야 최초의 한국인

의학교를 졸업하거나 검정 의사 시험을 통과해 의사 면허를 받은 한국인 의사의 배출이 많아지면서 진료에서 한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하지만 인구에 비해 의사가 턱없이 부족해 일제강점기에 의사 1인당 인구가 1만 명이 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졸업과 동시에 바로 개업을 하면 돈을 벌고 지역 주민으로부터 존경도 받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의학교에 남거나 외국 유학을 통해 특정 분야의 학문에 정진함으로써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전문의)가 된 의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번 연재에서 다루는 '최초'라는 의미는 그 기준에 따라 애매한 경우가 많을 수 있다. 자칫 역사를 왜곡할 소지도 있다. 또 초창기의 의사들은 의학에서 기본이 되는 내과 및 외과와 관련된 진료 활동을 했으므로 새삼스레 누가 먼저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진료 분야의 경우 산부인과와 안, 이비인후과만 살펴보기로 한다.

최초의 의학 박사
▲ 윤치형의 의학 박사 수여 기사(<매일신보> 1924년 6월 11일자). ⓒ동은의학박물관

한국인으로 최초의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윤치형(1896~?)이다. 그는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를 졸업하고 총독부 관비생으로 큐슈제국대학의 제2외과에서 근무하다가, 1922년 독일의 푸레스라우대학에 유학하였다. 그는 1924년 큐슈제국대학에 복귀하여 의원으로 일하던 중 일어와 독일어로 쓴 <건강 폐와 폐결핵에 미치는 기흉(氣胸)의 작용>으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편,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하 세의전)를 졸업한 김창세(1893~1934)는 1925년 1월 미국의 존스 홉킨스 보건대학원에서 <녹두콩에 대한 화학적, 생물학적 연구>로 최초의 보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부학자 최명학

'해부학 실습'하면 그 말만 들어도 왠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납량 영화의 좋은 주제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의 해부학이 바로 서양 의학의 상징적인 분야이다.

1926년 세의전을 졸업한 최명학(1898~1961)은 한국인 최초로 해부학을 전공하여 1932년 4월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양서류 유자(幼子) 이(耳)의 결정 및 이대외배엽 측(側)의 특이성>으로 의학 박사를 취득하고 모교의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가 연구에 사용하였던 고전적인 이식 방법은 지금도 실험 발생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기법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내이뿐 아니라 전반적인 발생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최명학은 학자로, 과학자로 한국인의 우수성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학내 문제로 1936년 모교 교수직을 사임한 최명학은 고향인 함흥으로 낙향하여 외과의원을 개업하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북한 최초의 박사 및 교수로 임명되었고 함흥의학대학과 평양의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하는 등 북한의 의학 교육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 제72호 후방병원 원장, 조선인민군 군의군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52년 창립된 과학원에서 의학 분야의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최초의 원사로 추대되었다. 이후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961년 12월 작고하였다.

남과 북에서 모두 의학자로 뛰어난 활동을 한 최명학은 그의 순수한 학문적 업적과 아울러 통일 시대를 바라보는 오늘날 더욱 의미 있는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시절(1932년)과 말년(1958년)의 최명학. ⓒ동은의학박물관

미생물학자 유일준
▲ 유일준 익사 기사(<동아일보> 1932년 8월 14일자). ⓒ동은의학박물관

일제 시기 수시로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전염병은 한국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였다. 전염병 퇴치에 중요한 원인균에 관해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미생물학(세균학)이다.

1918년 경의전을 졸업한 유일준(1895~1932)은 1921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혈청학의 대가 우렌흐트 교수의 문하생이 되어 각종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체에 대해 연구를 했다. 그는 연구에 정진하여 1923년 7월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일본의 게이오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여 1926년 <티프스, 파라티프스 및 적리의 제연구>로 박사 학위를 다시 받았다.

그는 1926년 10월 1일 모교의 미생물학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경의전에서 한국인 최초의 주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납두균 효소, 저온 혈구 응집소, 발진티푸스 등에 관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1932년 8월 가족과 함께 한강에 놀이를 나갔다가 안타깝게도 38세의 젊은 나이로 익사하였다.

병리학자 윤일선

윤일선(1896~1987)은 1923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모교에서 병리학 연구를 계속하다가 1926년 6월 갓 설립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국하여 1928년 3월 한국인 최초의 제국대학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1926년 여름부터 세의전에 강사로 출강을 시작했는데, 1928년 4월 모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29년 4월 세의전의 병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제자 이영춘은 <생체에 있어서의 니코틴 작용이 성호르몬에 미치는 영향>으로 경도제국대학에서 의학 박사를 받았다. 이것은 당시 한국에서 수행한 연구로 일본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처음으로 받은 것이었으며, 병리학이란 범위를 넘어 서양 의학 연구의 토착화에 크게 공헌한 쾌거였다. 이와 같이 세브란스의 연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윤일선은 조선의사협회의 창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해방이 되자 경성대학 의학부의 의학부장에 취임했다가 국립 서울대학교의 병리학 교수 및 서울대학교의 첫 대학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954년 학술원 회장으로 선출된 후 1956년 서울대학교 제6대 총장으로 임명되어 국립 고등 교육의 틀을 갖추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65세로 정년이 되던 1961년까지 256편의 연구를 지도했고 152명의 의학 박사를 배출하였다.
▲ 윤일선(1929)과 그의 정년 논문집. ⓒ동은의학박물관

산부인과 신필호
▲ 신필호와 스승 허스트. ⓒ동은의학박물관

전통적으로 여성의 몸을 외간 남자에게 보이는 것은 금기시되어 왔다. 제중원에 여자 선교사가 파견되어 부녀과가 설치된 것도 그런 연유였다. 산부인과는 여성의 특유의 질환을 다루는 부인과와 분만과 관계된 산과로 나눌 수 있다.

신필호(1893~1952)는 1914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에 처음 도입된 인턴으로서 모교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산부인과의 허스트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발생학 등의 과목을 강의하기도 했다. 1917년에는 산부인과의 강사를 시작으로 조교수까지 승진하였다.

하지만 1925년 모교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잠시 황해도 연안에서 개업하다가, 1928년 2월 서울의 인사동으로 이전 개업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개인 산부인과의원이 고작 4군데뿐이었다. 그중에서 3개는 일본인이 경영하였으므로 신필호산부인과만이 한국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산부인과병원이었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신필호는 동위원장이란 감투를 쓴 일이 있고, 정부가 수복되자 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그래서 1.4 후퇴 때는 서둘러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1952년 2월 급서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안, 이비인후과 홍석후

현재 안과는 눈의 질환을, 이비인후과는 귀, 코, 목의 질환을 다루는 분리된 전문 분야이지만 예전에는 안, 이비인후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홍석후(1883~1940)는 1905년 12월 의학교를 제3회로 졸업한 후 잠시 종로에서 자혜의원을 개업했다. 하지만 환자를 보기에 경험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닫고 1906년 2월 1일 제중원의학교 편입하였다. 그는 동기생 김필순 및 홍종은과 함께 거의 전 과목에 걸쳐 한국어로 써진 의학교과서를 출판함으로써 서양 의학의 토착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1908년 세브란스를 제1회로 졸업한 그는 모교에 남아 안, 이비인후과를 택함으로써, 당시 내과와 외과로 크게 세분되던 한국 의학 초창기에 전문의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에비슨 및 안, 이비인후과 전문의 바우만으로부터 전문적인 지도를 받았으며, 미네소타의 안, 이비인후과 전문의 매칸넬 박사의 병원, 캔사스시립대학 치과대학 해부학 및 뉴욕시립대학 의과대학원 등에서 전공 연구를 계속하였다.

귀국 후 세의전 교수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9월 교수직을 사임하고 종로 2가 기독교청년회에 홍석후진찰소를 개원하여 활동하다가 1940년 11월 17일 운명했다.

2008년 4월 10일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한국 안과 및 이비인후과의 개척자로서 홍석후의 흉상이 모교 교정에 세워졌다.
▲ 홍석후(1914)와 그가 사용하던 안경 원석. ⓒ동은의학박물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