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과 시작>의 주인공들. 가운데 민규동 감독과 김효진, 엄정화.ⓒ프레시안 |
<끝과 시작>은 남편이 사고로 죽은 이후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에게 남편의 정부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러나 끈적한 삼각 불륜관계 이야기에서 흔히 예상되는 통속적인 영화와는 궤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남편의 정부는 요염하고 섹시한 얼굴로 아내를 비웃는 대신, 신비로운 분위기와 앳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찾아와 배신감과 상실감에 뒤엉켜 괴로워하는 여자에게 "뭐든 할테니 옆에 있게만 해달라"고 부탁한다. 복수심과 분노에 찬 여자가 아무리 그녀를 막 대하고 심지어 하녀처럼 부려먹어도, 소녀는 마치 죄값을 치른다는 듯 헌신적으로 여자를 돌본다. 한 남자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공유하던 두 여자의 관계는 그렇게 애증으로, 그리고 이상한 유대관계로 복잡해져 간다.
총 8일간에 걸쳐 찍은 이 영화는 공간이 제한돼 있는 대신 두 사람의 심리에 <끝과 시작>의 제목은 민규동 감독이 이야기를 구상하던 당시 그의 책상 위에 꽂혀있던 폴란드의 여성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집 제목, 그리고 T.S. 엘리어트의 시 '번트 노튼'에 나오는 시구인 "끝이 시작에 앞선다고 말하라, / 그리고 끝과 시작은 언제나 / 시작 전과 끝 후에 거기에 있었다고."에서 따왔다고. 애초 <오감도>에 수록된 단편 버전에서부터 김효진의 노출 연기를 비롯해 엄정화, 김효진의 동성애 연기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 민규동 감독ⓒ프레시안 |
김효진은 주로 여고생 혹은 20대 발랄한 청춘의 이미지를 연기해왔지만, <끝과 시작>에서 맡은 나루 역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아무렇게나 자른 듯 비죽한 머리카락에 아무거나 아무렇게 대충 껴입은 듯한 옷. 김효진의 설명에 따르면 나루는 "집도 절도 없이, 머무르는 곳도 없이 떠도는 아이"다. 그리고 풀 씨앗에서 자란 나무에서 나온 아이다. "나루는 어깨와 발등에 문신이 있다. 머리도 아무렇게나 비죽비죽하다. 나무에서 나온 아이라 색깔 컨셉도 녹색으로 잡았고, 그래서 손톱을 녹색으로 칠하고 나온다. 원래는 긴 머리였는데 나루 역을 위해 비죽비죽한 짧은 머리로 잘랐다. 이 모든 것은 감독님이 나루 역을 위해 정말 세심하게 준비하신 결과"라고 말한다.
한국영화에 전례없던 이 생소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어렵거나 심적 부담이 되지는 않았을까? "너무너무 신났어요, 새로운 도전이니까요." 김효진은 잘라 말했다. 그리고 엄정화가 옆에서 참으로 많은 배려를 해주고, 모니터링도 해줬다고 한다. "정화선배와 함께 연기하는 씬 전에는 배가 고파도 계속 이야기를 했다"고 밝힌다. 반면 엄정화는 "효진이가 워낙 가냘픈 몸매고 어린 친구라 나도 모르게 보호해줘야겠다는 보호본능이 들었는데, 정작 영화 속 그 장면은 (내가 맡은) 정하가 나루의 리드에 끌려가는 입장이라 연기하면서 많이 미안했다"고 한다. 민규동 감독이 옆에서 덧붙였다. "그 장면을 찍고 정화 씨가 "여자가 내 위에 있는 게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고 고백하던데, 난 그 얘길 듣고 엄청 기분이 좋았다."
<끝과 시작>은 12일 오후 한 번 더 상영이 남아있다. 내년 상반기에 일반 극장에서 개봉할 계획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일정이 확정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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