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작전명 발키리> 개봉 당시 홍보차 내한해 한국 감독들과 교류하고 돌아갔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그만큼 김지운 감독과도 편하고 친근해 보였다. 통역을 통함에도 서로 농담도 거리낌없이 주고받으며 구름떼처럼 몰려든 관객들을 웃겼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전 어제 그냥 일찍 잤어요. 그런데 보니까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술을 잘 하더라고요. 보드카를 어찌나 마셔대던지" "술은 김지운 감독도 만만치 않던데요. 실은 내가 먼저 자러 들어갔다고요." "아니 난 손님 접대를 하느라 그런 거죠. 그냥 물만 마셨어요." "아, 그 맑은 게 물이었어요? 소주였을 텐데?"
▲ 오픈토크에 참여한 브라이언 싱어 감독(왼쪽)과 김지운 감독. 이 둘은 마치 만담 플레이를 펼치듯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해운대 야외무대 앞에 모여든 관객들을 즐겁게 해줬다.ⓒ프레시안 |
서로 상대의 열렬한 팬이라 고백한 두 감독은 이렇게 서로를 놀리는 농담으로 오픈토크를 시작했다. 두 감독은 서로 상대가 만드는 영화마다 장르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기 때문에, 좋아하는 작품을 어느 하나로만 딱 고르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마다 참 달라요. 최근에 누가 또 뭘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기에 일단 <달콤한 인생>이라고 대답은 했는데, 사실 하나만 꼽기가 어렵죠."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을 탄 <퍼블릭 엑세스>만 빼놓고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영화를 모두 봤어요. 브라이언 싱어 감독 역시 작품마다 스타일과 장르가 다르죠. <유주얼 서스펙트>는 강력한 반전을 가지고 있는 서스펜스 영화였는데, 그 바로 다음 작품은 다소 무겁고 장중한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Apt Pupil)>이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 작품은 <엑스맨>이더라고요. 이건 마치 마이클 베이 감독이 저예산을 갖고 인종문제와 관련된 영화를 찍는다고 해야 할까, 타란티노 감독이 <사운드 오브 뮤직>을 리메이크하겠다고 나선 느낌이랄까. (여기서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제겐 그 정도로 충격이었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특히 <유주얼 서스펙트>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보통 반전이 대단한 영화들은 다시 보지 않게 되는데, <유주얼 서스펙트>는 예외예요. 이 영화는 오히려 두 번째 볼 때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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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헐리웃에서 연출 준비를 하고 있는 김지운 감독은 헐리웃 시스템의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일단 한 감독이 한 영화를 하게 되면 그게 끝까지 그나마 안정적으로 쭉 가는 거로 인식되죠. 헐리웃은 다르더라고요. 한 단계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단계가 도대체 어떻게 될지, 어디로 향할지 도저히 예측을 할 수가 없어요. 물론 이건 내가 헐리웃 시스템에 대해 무지해서 더 예측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김지운 감독의 말을 수긍해 주면서 한국과 헐리웃의 시스템 차이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김지운 감독의 말에 저도 공감합니다. 김지운 감독이 제대로 보신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한국의 감독들은 작품에 대해 굉장한 자유를 부여받고 파이널 컷에 대한 권리(최종편집권)도 보장받는다는 점이에요. 헐리웃은 아무래도 한 작품에 대규모의 예산을 쏟아넣기 마련이라 감독 한 사람에게만 맡겨둘 순 없다는 분위기죠. 그래서 감독이 파이널 컷 권리를 갖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김지운 감독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묻자, 김지운 감독은 어릴 적 본 이소룡의 영화들, 그리고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를 들었다. 그러자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열정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엑소시스트>는 정말 대단한 영화죠. 사실 영화가 그리 길지도 않은 영화인데도 그 안엔 참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고 엄청 무섭기도 해요." <작전명 발키리>로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인터뷰를 했던 이동진 씨는 "사실 그때 가장 서스펜스가 뛰어난 영화를 꼽아달라고 했더니 싱어 감독이 <엑소시스트>를 꼽았다"면서, "두 감독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고 부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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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한국에 온 외국인들, 특히 서구인들에겐 "한국음식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동진 씨는 이를 바꿔서 차마 이건 못 먹겠더라 싶은 음식이 있는지 물었다. 김지운 감독은 "전 햄버거를 경멸합니다"라고 대답해 놀라움을 안겨줬다. '경멸'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음식에 대한 표현으로는 너무 세다. 순간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표정도 움찔했다. "입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게 먹으면서 뭐가 계속 흐르고 하는 게 싫어요. 옷에 뭘 묻히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20대 이후로는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고기를 다져서 요리하는 거라면 한국의 떡갈비가 최고지요."
이에 대한 항변이 이어졌다. "이거 나한테 수적으로도 불리한 질문이에요. 김지운 감독은 한국에 있으니까 '햄버거'라고 대답하지, 내가 만약 여기서 '김치'라고 대답하면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엄살'에 객석에서 폭소가 쏟아졌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현명한' 대답을 찾은 듯했다. "실은 해삼(sea cucumber, cucumber는 '오이'를 뜻한다.)은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요. 전 오이는 좋아하는데, 오이인 줄 알고 주문했다가 이상한 게 나와서 놀랐습니다." 그러자 김지운 감독의 유머가 치고 들어왔다. "이거 오늘 꼭 개불을 먹여야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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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담을 나누는 사이에 어느 새 해가 지고 주변이 캄캄해졌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감독이란 언제나 개별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라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김지운 감독과 꼭 함께 작업해 보고 싶어요. 지금으로선 어떻게 하면 가능할지 방법을 모르겠지만, 방법을 찾아보고 싶어요."라며 김지운 감독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렇게 유머러스한 두 감독과의 즐거운 대화가 끝나고, 해운대 백사장에 모여앉았던 관객들도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일어섰다. 물론 적지 않은 수의 관객들이 두 감독에게 싸인을 부탁하며 몰려가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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