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두루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물론 <호우시절>이다. 죽향이 화면 밖으로까지 퍼져나오는 것만 같은 아름다운 두보초당의 전경이 인상적이다. <푸른 강은 흘러라>는 색다르고 소박한 영화에 마음이 열려있는 관객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웬만한 호러영화도 폭력도 무섭지 않다는 관객들에게 <퍼니게임>을 추천한다. 살짝 귀뜸하자면, <퍼니게임>에서 피나 물리적 폭력이 많이 묘사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해 폭력을 경험케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미하엘 하네케 감독만큼 능숙하게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감독도 드물다. <헬로우 마이 러브>는 상큼하고 통통튀는 20대 청춘물을 좋아하는 여성관객들에게 특히 어필할 만한 영화다.
▲ 호우시절 |
감독 허진호
주연 정우성, 고원원, 김상호
중국 청두에 출장간 박동하(정우성)는 두보초당에 들렀다가 미국유학 시절 좋아했던 메이(고원원)를 만난다. 친구와 우정사이, 좋아하면서도 어정쩡한 관계였던 두 사람은 우연한 재회에서 다시 설레임을 느끼고, 서로 진심을 담으면서도 상대를 떠보는 말투로 인연을 시험한다. 청두의 거리를 거닐며 데이트를 하는 두 사람. 동하가 메이를 위해 하루 더 머물기로 결심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진전을 맞는 듯하지만, 동하는 메이에 대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대지진의 비극을 경험한 중국 청두를 배경으로, 청두가 낳은 위대한 시인 두보를 매개로 두 남녀의 재회와 설레임을 담은 허진호 감독의 신작. 언제나 남녀의 멜로를 다루면서도 그 안에 날서고 독기어린 면들을 숨겨놓곤 했던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서 이번엔 그 날과 독기가 빠졌다. 영화는 마치 긴 CF 한 편을 보듯 아름답고 예쁘지만, 한편으로 어딘가 허전하고 심심한 느낌도 면할 수 없다. 그래도 오랜만에 멜로로 돌아온 정우성과 청초한 고원원간 케미스트리, 그리고 이들의 재회와 설레임을 섬세하게 빚어내는 허진호식 연출은 여전히 빛이 난다.
▲ 헬로우 마이 러브 |
감독 김아론
주연 조안, 민석, 류상욱
파리로 요리 유학을 떠난 남자친구 원재(민석)와 원거리 연애를 하며 라디오 작가 및 DJ로 일하고 있는 호정(조안). 10년을 이어온 사랑인 만큼 원재가 돌아오면 청혼을 받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마침내 귀국한 원재는 파리에서부터 룸메이트로 지냈다며 그와 함께 돌아온 동화(류상욱)와 와인바 개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어느 날, 원재를 찾아간 그녀는 원재와 동화가 함께 춤을 추다 키스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내 남자친구가 만약 다른 (여자가 아닌) 남자와 바람이 난다면?"이라는, 여자들이 한번씩은 해봤을 법한 공상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드라마.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 공식을 빌어오면서도 이야기의 전개는 오히려 '실연한 여자의 사랑 되찾기' 장르에 가깝다. 필사적인 그 시도들은 필연적으로 실패로 끝날 수밖에. 그 과정에서 한뼘, 훌쩍 성장하는 호정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다소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를 깔끔하게 풀어나가는 솜씨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더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너무 안정적이고 나이브하게 한정시킨 듯한 아쉬움도 남는다. 올해 전주영화제를 통해 처음 소개가 됐다.
▲ 푸른 강은 흘러라 |
감독 강미자
주연 김예리, 남철
연변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숙이(김예리)와 철이(남철)는 서로 공부도 도와주고 남도 배려를 잘하는 착한 모범생들이다. 두만강처럼 늘 푸르게 살자고 다짐하던 이들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온다. 근사한 오토바이가 탐이났던 철이는 한국으로 밀입국간 어머니가 보내준 돈으로 오토바이와 휴대폰을 사고, 이후 점차 숙이에게도 소홀하게 대하고 공부도 게을리하면서 일탈해간다. 그런 철이를 보는 숙이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한편 한국에서 일하던 철이의 엄마가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철이에게는 더욱 격변의 시간이 찾아온다. 연변 아이들의 청춘담. 모든 대사가 연변 사투리인 데다 낯설기 짝이 없는 문어체적 대사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처음엔 생경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도 지나치게 착하고 선생님도 지나치게 배려심이 짙다. 혹은, 어쩌면 우리의 아이들이 지나치게 영악해지고 학교 선생님들에게도 더이상 바라는 게 없게 돼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연변 청소년들의 청춘담을 통해, 소위 '공화국'의 가치를 배우고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도 점차 그곳에도 불어오는 자본주의의 바람에 혼란과 일탈을 느끼는 아이들의 표정을 잡아낸다. 독립영화계에 새로이 떠오르는 젊은 여배우 김예리가 숙이 역을 맡아 연변 소녀 역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해 낸다.
▲ 정승필 실종사건 |
감독 강석범
주연 이범수, 김민선, 손창민
50억대의 자산관리사인 정승필(이범수)이 약혼녀 미선(김민선)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잠시 편의점에 들리겠다며 내린 뒤 그대로 사라진다. 실은 화장실을 찾던 그가 그만 철거 직전의 낡은 건물 화장실 안에 갇혀버린 것. 그런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승필을 기다리던 미선은 그를 원망하며 돌아오고, 김형사(손창민)는 친한 방송 기자와 손을 잡고 이를 실종을 위장한 공금횡령 사건으로 몰고 간다. 한편 박형사(김뢰하)는 미선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이 가운데 정승필 실종사건은 점차 웃지 못할 정도의 규모로 부풀려져 간다. 애초에 별것 아닌 것이 점차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착각과 오해로 규모가 커진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지만, 이 영화는 그 아이디어를 제대로 된 '이야기'로 발전시키지 못한 채 억지 시간끌기와 우기기로 질질 끈다. 배우들 역시 캐릭터의 가능성만 보여준 채 제대로 캐릭터를 발전시킬 기회를 맞지 못한 채 소진당한다. <어디선가 누구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과 <해바라기>를 만들었던 강석범 감독의 세 번째 영화.
▲ 퍼니 게임 |
감독 미하엘 하네케
주연 나오미 왓츠, 팀 로스, 마이클 피트
앤(나오미 왓츠)과 조지(팀 로스)의 가족이 여름 휴가를 맞아 별장을 찾는다. 해질녘, 깔끔한 차림의 청년 피터(브래디 코벳)가 달걀을 빌려달라며 이들을 찾아오고, 곧이어 피터와 똑같은 차림의 낯선 청년 폴(마이클 피트)까지 등장한다. 불안감을 느끼던 앤과 조지에게 두 청년은 순식간에 본성을 드러내며 조지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곧 그들에게 12시간 안에 일가족 모두를 죽이는 게임을 벌이겠다고 공언한다. 1997년작인 영화 <퍼니 게임>을 미하엘 하네케 감독 자신이 미국에서 직접 다시 리메이크했다. 97년 당시 공개돼 큰 충격과 논란을 낳았고, 국내에서도 정식으로 극장개봉해 영화팬들에게 경악을 안겨준 바 있다. 독일어 영화인 만큼 세계 관객들에게 폭넓게 소개되지 못한 것을 감독 자신이 아쉬워해 직접 리메이크했다. 2007년작인 이번 새 버전에서는 나오미 와츠와 팀 로스가 부부를 이루었고, <헤드윅>, <몽상가들>에 출연했던 마이클 피트와 그렉 애러키 감독의 <미스테리어스 스킨>에 출연했던 브래디 코벳이 천진하고 말끔한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고문과 살인을 저지르는 낯선 방문객 역을 맡았다.
▲ 다 큰 여자들 |
감독 토미나가 마사노리
주연 오다 에리카, 모노우 아키코
주부잡지의 편집부 기자인 치아키(오다 에리카)와, 과거 그녀의 직장동료였지만 지금은 어린 딸을 키우고 있는 주부 5년차 마사미(모노우 아키코)는 서른을 앞두고 있는 29살 동갑이다. 둘은 모두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채 상대의 삶을 부러워한다. 일 잘하기로 소문난 치아키는 정작 자신은 이제 결혼을 해볼까 고민하고, 예쁜 딸이 있는 마사미가 부럽다. 반면 잡지에 나오는 완벽한 주부처럼 보이는 마사미는 아내로, 어린 딸의 엄마로만 자신의 삶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 같아 허무하다. 어느 날 치아키가 아무 말도 없이 잠적해 버리고, 마사미는 아이도 팽개친 채 마사미의 빈 자리를 채우며 일에 몰두한다. 일본의 만화가 아비코 마리가 2005년에 내놓은 [이런 어른 여자들]이 원작으로, 모든 것이 무력하고 불만족스러운 29살 여성들의 불완전하고 허전한 삶과 행복찾기를 그려낸다. 감독인 토미나가 마사노리는 2006년 오다기리 조와 카시이 유우가 주연을 맡은 <파빌리온 살라만더>로 장편 데뷔했으며, <다 큰 여자들>은 그녀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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