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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영웅호색' 입에 올리는 당신은 다른가?

[홍성태의 '세상 읽기'] '영혼의 파괴'가 만연한 사회

신과 마는 저기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 인간은 신과 동물의 중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신성과 마성을 모두 갖춘 독특한 동물이다.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위해 다른 존재를 멋대로 괴롭히고 이용하는 순간, 인간은 마성에 사로잡힌 악독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런 인간에 대해서도 사회는 보호의 책임을 지는가? 이런 인간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을 품어야 하는가? 막대한 예산을 불필요한 토건 사업에 퍼붓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아동을 지키는 데 써야 이 사회가 악독한 존재의 참혹한 범죄로부터 보호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린 소녀를 악랄하게 성폭행해서 불구로 만든 조두순이라는 자가 체포되었다. 이 자의 범죄에 정말이지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가 평생 심각한 불구로 살아야 한다니 더욱 더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 조두순이라는 자가 저지른 죄는 이미 너무나 크다. 미국이라면 4000년을 넘는 세월 동안 징역을 살아야 한다고 할 정도가 아닌가? 전자발찌를 평생 부착하도록 하는 것이 이런 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될 수 있을까? 죄에 대해서는 당연히 합당한 벌이 내려져야 한다. 감정에 휩쓸려서 범죄에 비해 과중한 처벌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사회는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범죄에 대해 너무나 미약한 처벌을 내리는 경향을 보였던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조두순에 대한 처벌은 성폭행 범죄의 처벌에 대한 확실한 전환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한 전문가는 텔레비전 뉴스의 인터뷰에서 성폭행범을 '영혼의 파괴자'라고 불렀다. 그렇다. 성폭행은 단순히 육체의 훼손에 그치지 않고 '영혼의 파괴'를 야기한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특히 아동의 경우에 그 영향은 더욱 더 크다. 여기서 1991년 1월에 발생한 한 미성년 성폭행 피해자의 뼈아픈 이야기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녀는 어릴 때 당한 성폭행의 고통을 잊지 못하고 21년 뒤에 가해자를 찾아가서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자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격분한 그녀는 그 자를 살해했다. 그녀는 '영혼의 파괴'에서 벗어나기 위해 범죄자의 고백과 반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는 마성에 사로잡혀 범죄를 부인하고 계속 피해자를 괴롭혔다. 그녀는 그 자를 죽이고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라고 절규했다.

이 사건은 미성년 성폭행에 대한 사회의 경각심을 높이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이 사회에서는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가? 사실상 아무런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악독한 놈들이 아동들을 위협하고 유혹해서 저지르는 성폭행 범죄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작년에 뉴스를 통해 공개된 한 CCTV의 동영상이 잘 보여주었듯이, 그들은 마치 사냥을 하듯이 여자아이를 마구 때려서 잡아간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책이나 처벌은 여전히 제 자리를 맴돌고 있다. 분노와 우려는 이미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정부의 대응은 미봉의 수준을 여전히 벗어나지 않고 있다. '조두순 사건'은 미성년 성폭행에 대한 인식을 근원적으로 개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가 '영혼의 파괴'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 한다.

미성년 성폭행은 성폭행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성폭행으로 손꼽히지만 사실 성인에 대한 성폭행도 '영혼의 파괴'를 초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체포된 연쇄성폭행범들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성폭행범들은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약자들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습관적으로 저지르고, 피해자들은 혹심한 고통에 빠져서 생활을 영위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성폭행에 대한 수사와 처벌은 피해자를 또 다시 피해자로 만든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피해자에게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성폭행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게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제대로 진술을 하고 치료를 받는 것조차 어려운 곳에서 성폭행이 줄어들기는 바라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성폭행에 대한 수사와 처벌은 정상화되었는가?

이 사회에서는 심지어 강간은 없고 화간만 있을 뿐이라는 황당한 생각조차 여전히 불식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 성폭행을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미화하는 음란물도 널리 유포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폭행 범죄자에 대한 수사와 처벌은 더욱 더 엄정하게 이루어져야 할 테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그렇지 않아서 요식적 수사와 미봉적 처벌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이미 오래 전부터 강력히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피해자가 합의를 하면 처벌을 경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악용해서 피해자와 가족을 협박해서 강제로 합의를 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술김에 잘못을 저지른 것이어서 처벌을 경감한다는 것에 비하면 합의가 악용되는 것은 그나마 낫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폭행을 처벌하겠다는 것인지 조장하겠다는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정말로 적지 않다.

온갖 성폭행 사례들을 보노라면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상당히 또렷하게 깨달을 수 있다. 나이와 계층을 막론하고 여성이라면 무조건 사냥감으로 여기고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남성이라는 짐승이 이 나라의 도처에 널려 있는 것 같다. 이런 자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관련 기구가 크게 축소되었다. '영웅호색'이라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전근대 사회의 반여성적 발상이 여전히 상식처럼 유포되고 있는 가운데 여성을 보호하고 인권의 수준을 높이는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커질 수밖에 없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요란하게 논란하는 것이 아니라 성폭행 문제의 비인간성과 비정상성을 올바로 인식하는 근원적인 전환이 이 사회 전체에서 확실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절반은 여자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불안은 사회의 불안일 수밖에 없다. 여자가 불안하게 사는 사회는 그 자체로 불안한 사회이다. 여자가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사회는 그 자체로 불행한 사회이다. 여자가 차별을 받는 사회는 그 자체로 불평등한 사회이다. 여자는 남자의 적이 아니고 사냥감은 더더욱 아니다. 여자와 남자가 인간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여자와 남자를 그 본성에 적합하게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 사회 활동의 능력에서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전체로 보아서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나 여자는 임신, 출산, 육아의 직접적인 담당자로서 사회의 유지를 위해 남자보다 더 중요하다. 좋은 사회는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 여자를 더욱 존중하는 사회이다. 이를 위해 비합리적인 남자 중심의 세계관을 근원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 여성을 상대로 한 성폭행을 일종의 '성장통'으로 표현한 영화 <나에게 오라>. ⓒ프레시안
불행히도 이 사회는 여성에 대한 '영혼의 파괴'가 만연한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 자행되는 성폭행 범죄는 신고된 것의 10배를 훨씬 넘는다고도 한다. 몇 해 전인가 <나에게 오라>(1996년)라는 영화를 보다가 시골의 젊은 동네건달 역을 맡은 박상민이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붙잡아서 겨울의 논두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성폭행하는 장면을 보면서 끔찍해했던 기억이 있다. 이 영화에서 여자는 다른 놈들에게도 이런 일을 이미 여러 차례 당했던 것으로 설정되어 스스로 아랫도리를 벗고 내준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 사회가 정말로 그처럼 자연스럽게 성폭행이 자행되는 사회인지 모른다는 참담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성폭행은 참혹하고 부끄러운 범죄이며, 거기에 길들여지는 피해자는 어디에도 없다. 이런 점에서 그 영화는 '오독'의 소지를 지니고 있다.

마성에 사로잡힌 한 초로의 남성에 의해 끔찍한 반인륜 범죄가 저질러졌다. 그러나 비슷한 범죄가 여기저기서 계속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더욱 더 주의해야 한다. 후진적인 남성 중심의 세계관이 문제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다면, 범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정책은 문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를 '3F의 시대'라고 한다. 감성(Feeling), 상상(Fiction), 여성(Female)이 그것이다. 단지 여성을 보호하고 인권을 신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른바 경쟁력의 차원에서도 여성을 존중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부디 '영혼의 파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정책의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그 결과 여성과 아동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것은 이 사회의 '진정한 선진화'를 위한 핵심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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