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곳은 선덕 여왕이 건립한 것 말고도 유사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건축 양식이 모두 인도 양식을 따랐다. 암석을 벽돌 형태로 절단해 쌓는 이런 인도 양식은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보통 공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선덕여왕은 왜 이런 인도 양식을 고집했을까? 기록을 염두에 두면, 선덕여왕의 건강 상태 때문인 듯하다.
선덕여왕은 질병을 심하게 앓았다. <삼국사기>를 보면, 636년(선덕여왕 5년)에 선덕여왕은 병을 심하게 앓았으나 기도가 통하지 않자 황룡사에 승려를 모아서 독경을 시켰다. <삼국유사>에도 선덕여왕의 병이 깊어서 흥륜사의 스님 법창에게 치료를 의뢰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해, 결국 밀본법사의 독경으로 완치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신라에서는 불교와 의학이 결합된 승려의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잘 알다시피 승려의학은 인도 의학에서 유래한다. 당시 인도 의학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의학이나 중국의학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내, 외과학 모두 상당한 수준의 의학이었다. 이것이 불교 의학으로 확립되었는데, 신라의 의술은 바로 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불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신라 의학을 염두에 두면, 선덕여왕이 분황사, 첨성대를 건립하면서 인도 양식을 고집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은 원시 불교에서 탑을 숭배했던 것처럼, 자신의 병을 비롯한 공사의 근심을 호소할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자 인도 양식으로 분황사, 첨성대를 건립했던 것이다. (분황사 부처는 약사여래불이다!)
▲ 드라마 <선덕여왕>. ⓒ프레시안 |
하늘이 어떤 상태일 때 씨를 뿌리고, 물을 대주며, 추수를 해야 하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하늘의 변화에 따라서 농사를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땅의 절대자'인 왕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수단이었다. 선덕여왕 역시 천문학을 자신의 것으로 만다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첨성대는 최초의 천문대였다. 실제로 첨성대는 석단 27단 위에 井자 모양의 단을 합해 모두 28단으로 이뤄져 있다. 이 28단은 농사와 긴밀한 28절기를 상징하는 28개의 별을 상징한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361개 반으로 음력으로 따진 1년의 일수와 일치한다. 첨성대 꼭대기는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이렇게 첨성대를 천문대라고 규정하면 늘 따르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별을 어떻게 관찰했을까? 많은 이들은 첨성대의 규모가 크지 않음에 적잖이 실망하면서 이런 의문을 품곤 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어차피 망원경이 없었던 그 시절에는 첨성대와 같은 천문대 자체가 굳이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첨성대 자체는 인도 양식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일종의 상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덕여왕 자신의 건강과 나라의 안위를 기원하고, 천문학을 관장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 말이다. 특히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자신의 권위를 백성에게 세울 만한 상징이 필요했을 테고, 첨성대야말로 제격이었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전혀 쓸모가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아폴로13호>를 보면, 표류하던 우주인들은 지구를 찾고자 우주선 안의 모든 등을 끄고 우주 공간을 직시한다. 땅에서 별을 보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광공해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이들에겐 골칫거리다.
신라 때라고 광공해를 우습게보면 안 된다. 경주 인근에 약 수십만 명이 모여 살았고, 그 대부분은 궁궐 주위에 모여 있었다. 첨성대 역시 언제든지 왕이 둘러볼 수 있도록 그 한가운데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주변의 빛으로부터 독립된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첨성대의 원통은 바로 그런 공간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첨성대는 천문대였다. 하지만 그 역할은 오늘날과 같이 관측에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가설 하나를 더 말해보자. 신라에 들어온 불교는 토착 신앙인 북두칠성을 숭배하는 신앙과 갈등을 빚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덕여왕은 북두칠성을 관측하는 불교 양식의 상징 첨성대를 통해 이 둘의 화해를 도모한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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