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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해부학상으로 봤을 때 야만인?"

[의학사 산책] 독립을 꿈꾼 의사들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식에 참석한 이토 히로부미

1908년 6월 3일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식. 게일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졸업식은 한국의 서양 의학 수용사를 개관한 스크랜튼의 강연, 학부대신 이재곤의 축사로 이어졌다.

제일 중요한 졸업 증서 수여 시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이끌던 또 하나의 주역인 허스트가 단상에 올라 졸업생을 호명했다. 교장 에비슨은 '의학 박사' 칭호가 써진 졸업증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졸업증서를 자신의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에게 넘겼다.

에비슨에게 졸업증서를 넘겨받은 하얀 수염의 사나이는 증서를 하나씩 졸업생들에게 수여하였다. 조선통감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어진 축사에서 "이러한 기념비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운을 떼었다. 졸업생에 대한 축하와 그들을 교육한 교수들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 의학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밝혔다.

"발전된 서양 의학을 소개하고 병원과 함께 학교에서 서양 의학을 가르치자!" 그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학교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졸업식에 참여한 이유였다.

서양 의학의 밝은 미래

서양 의학에게 식민지는 불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한국을 지배한 일본은 이미 19세기 후반 서양 의학 일원화를 성취한 상태였다.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처럼 일제의 지배가 현실화되면서 서양 의학은 육성되었다.

1913년 '의사규칙'은 대표적인 예였다. 이 규칙 반포로 '의사'는 서양 의학을 배운 의료인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정되었다. 전통 의학이었던 한의학은 이류 의학으로 규정되었다. 경쟁 상대가 없어진 서양 의학의 미래는 밝았다.

밝은 미래를 뿌리친 의사들

그러나 밝은 미래를 뿌리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토 히로부미의 축사를 듣고 있던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들이었다. 단상에 앉아 있던 7명의 졸업생 중 5명은 이후 국내외에서 전개된 독립 운동에 참가하였다.

김필순은 유명한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의 일원으로 국외 이상촌 건설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희영은 삼일 운동에 관여하였고, 박서양은 중국 간도 지역에 설립된 대한국민회의 군의(軍醫)로 활동하였다.

신창희와 주현측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에게 밝은 미래란 일제의 지배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축사를 듣는 그들의 마음은 못내 불편했을 것이다.

▲ 김필순과 함께 망명한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 이태준 기념 공원(몽골 울란바타르). ⓒ동은의학박물관

3·1운동과 의학생들

▲ 서울역 앞 옛 세브란스병원 위치에 놓여 있는 3·1운동 관련 기념 표석. ⓒ동은의학박물관
1919년 삼일운동은 일제의 지배를 뒤흔드는 거사였다. 지역, 신분, 성(性), 직업을 넘어선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선두에 섰다.

의학을 배우는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삼일운동을 거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는 79명이 퇴학을 당했다. 구금된 학생은 31명으로 전문학교 중 가장 많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도 9명이 옥고를 치렀다. 두 학교 모두 재학생의 20% 안팎에 이르는 숫자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다시 학교로 복귀하였지만 외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망명을 통한 독립운동

▲ 주현칙과 신현창의 삼일의원 광고(중국 상하이, <독립신문>). ⓒ동은의학박물관
삼일운동 이후 망명한 이들의 목적지는 상하이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는 동시에 자신의 전공인 의학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병원의 개원이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출신인 주현측과 신현창은 함께 상해에 삼일의원(三一醫院)을 개원하였다. 이름부터 이들의 지향을 알려주는 병원이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녔던 나창헌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당시 가장 중요한 질병이었던 결핵 치료를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였다. 병원은 그들이 망명지에 쉽게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이자 지속적인 투쟁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었다.

일본인 교수의 궤변에 대항한 동맹휴학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불씨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식민지가 서양 의학에 유리한 환경이었다고는 하지만 내부에는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 차별이었다. 교육에서 차별은 한국인 무시로 나타났다.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해부학을 가르치던 일본인 교수는 "한국인들은 해부학상으로 볼 때 야만에 가깝다"고 말했다. '과학'의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한 것이었다. 한국인 학생들은 시정을 요구했고, 학교가 그들을 처벌을 하자 동맹휴학으로 맞섰다. 학생과 학교 측의 충돌은 동창과 학부모의 중재로 진정될 수 있었다.

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면 차별은 더욱 분명해졌다. 관공립병원의 경우 의사를 채용할 때 일본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이 채용될 가능성은 "천부당, 만부당"이었다. 하늘이 도와서 채용된다 하더라고 그 자리는 일본인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일 뿐이었다.

차별에 불만을 느낀 한국인 의사들은 개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조선 놈은 개업이나 해먹어야지"하는 자조적인 탄식을 내뱉었다.

에메틴 사건과 민족 차별

▲ 디스토마 매개체인 다슬기를 잡는 모습. ⓒ동은의학박물관
민족 차별은 의사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이라면 일상적으로 만나는 일이었다. 한국인 의사들은 그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른바 '에메틴 사건' 때였다.

식민지 시대 한국인들에게 일반적이었던 질병 중 하나가 디스토마였다. 지방에 따라서는 80~90%에 이르는 감염률을 보이고 있었다. 일제는 디스토마 치료를 위해 염산 에메틴 주사를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주사가 말썽을 일으켰다.

1927년 3월 함경북도 영흥에서 디스토마 치료를 위해 100명의 주민이 에메틴 주사를 맞았다. 며칠 후 일제가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이 벌어졌다. 주사를 맞은 주민의 반 수 이상이 중독 증상을 보였고, 그 중 6명이 사망한 것이었다. 담당자인 총독부 위생과장은 마침 불어 닫힌 한파로 인해 감기가 폐렴으로 변하면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했다. 에메틴 주사와는 무관하다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주사가 과도하게 놓아졌다고 주장했다. 에메틴 주사는 반복될수록 효과가 좋았다. 따라서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환자의 건강 상태가 무시될 가능성은 항상 있었다. 주민들은 주사를 맞지 않을 경우 주사비를 징수하겠다는 협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전문가의 개입이 필요할 때였다. 한국인 의사들이 나섰다.

한성의사회의 활동

▲ 6·10만세 사건 관련 당시의 신문 기사. ⓒ동은의학박물관
서울시의사회의 전신이라고 할 '한성의사회' 의사들이 영흥을 찾았다. 이들은 중독자들을 진찰한 후 "지금까지 이렇게 괴상한 환자를 본 일은 없습니다"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나아가 "모든 증세로 보아 중독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 보고를 받은 한성의사회도 영흥의 주민들이 에메틴 주사로 인한 중독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공식적인 견해를 밝혔다. 일제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한 것이었다. 한국인 의사들이 일제의 일방적인 의료 정책에 비판의 메스를 든 것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한국 사회가 전시 체제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서 의사들의 메스는 내려졌다. 그만큼 일제의 억압은 무거웠다.

의사들은 '계몽'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민족의 선구자가 되어 난국을 타개"하기보다는 "위생의 개량 발전과 서양 의학의 보급에 노력"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가보다는 계몽운동가가 자신들에게 더 적절한 역할이라고 판단했다. 계몽은 중요했다. 문제는 계몽에서 독립까지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가가면서 해방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의사들도 있었다. 광복군, 조선의용대에 의사들이 참가하여 군의로 활동하였다. 국내에서도 움직임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의사가 되지 않은 의학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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