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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이는 정말로 '명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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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이는 정말로 '명의'였을까?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대장금의 진실

최근 드라마 <대장금>이 아시아를 넘어서 러시아에서 방송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드라마에서 대장장 역을 맡았던 배우 이영애의 결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드라마의 힘 때문에 허준과 함께 한의학의 상징처럼 된 대장금은 과연 실존 인물일까?

<조선왕조실록>에 대장금의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그가 실존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여의의 처지를 염두에 두면 드라마의 내용이 과장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다. 여기서는 대장금의 기록을 염두에 두고, 그를 둘러싼 진실을 한 번 살펴보자.

대장금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중종 10년(1515년) 3월 8일이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그해 2월 25일 원자(12대 인종)를 생산하고 숨을 거둔다. 이 때 원자인 인종의 생명도 위험에 처했는데, 이때 장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관례대로 조정 대신은 왕후의 죽음을 놓고 장금을 비롯한 의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건의한다. 중종은 수차례에 걸친 건의에도 불구하고 장금에게 끝까지 죄를 묻지 않았다. 원자를 생산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금에게 죄를 묻는 건 옳지 않다는 것.

1533년 1월 9일 중종은 종기를 앓아 고생한다. 이때 내의원은 그전에도 수차례 중종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을 세운 장금을 견제한다. 기록을 보면 내의원 장순손은 이렇게 중종에게 건의한다.

▲ 대장금은 과연 실존 인물일까? 그는 과연 명의였을까?
"대체로 종기를 앓을 때는 젊은 여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종기가 터진 후에도 더욱 부인을 기피해야 합니다."


장금이가 중종 근처에도 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견제 탓이었는지 중종은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장금이 약을 쓴 뒤에야 상태가 호전된다. 중종은 자신의 생명을 살린 장금에게 쌀 15석을 하사했다.

장금이는 1544년 10월 26일 다시 등장한다. 이 무렵, 중종의 병은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종을 둘러싼 기록을 보면 이상한 게 한두 대목이 아니다. 우선 내의원 제조가 중종의 병을 진단하기는커녕 그에게 증세를 묻는다. 의사가 환자에게 증세를 물어본 것.

이런 상황이 벌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중종은 이렇게 답한다.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 그 여의가 바로 장금이다. 중종은 마지막까지 장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다가, 결국 11월 15일 목숨을 거뒀다.

죽기 전까지 중종을 특히 괴롭혔던 질병은 산증이다. 산증은 하복의 통증이 위로 치받쳐 오르는 통증이다. 중종은 자신의 병을 이렇게 설명한다.

"요즈음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많은 한기가 배로 들어가 냉기가 쌓여 대소변이 편안하지 못하다."

장금은 여러 번에 걸쳐서 반총산이라는 처방을 투여한다. 그러나 차도가 없자 극적인 처방을 구사한다. 바로 밀정(蜜釘)을 사용한다. 밀정은 꿀로 관장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바로 관장을 통해 대변을 배출하도록 한 것이다. 중종에게 직접 관장한 것을 보면 장금과 임금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여의의 삶이 모두 다 장금처럼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여의(의녀)가 생겨난 것은 사대부 부인이 남자 의원의 진료를 거부하면서부터다. 태종 6년에 처음 구성된 의녀는 주로 관비 출신이었다. 의녀가 되는 것은 아주 극소수여서, 태종 18년의 기록을 보면 7명뿐이었다.

3년간 교육을 받은 의녀는 그 능력에 따라 내의녀, 간병의녀, 초학의녀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내의녀는 진료와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고, 간병의녀는 간병을 주로 담당했는데, 조산의 역할이 포함되었다. 초학의는 간병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하는 것이다.

여의의 지위는 역대 왕의 관심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특히 전문성을 위주로 진료하는 여의들을 창기와 같은 역할로 끌어내린 것은 연산군이다. 연회에 내의원의 의녀를 부르면서 약방기생으로 만들었다.

이후 의녀가 사대부의 잔치나 관원의 유희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제자리를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중종의 의녀에 대한 대우는 파격적이다. 중종 5년에는 연산군 때 생긴 폐습을 없애고자, 관원의 연회에 의녀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장금과 비슷한 이름은 실록에 여러 번 나타난다. 성종 때에도 의녀 개금, 덕금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장금 역시 천출이었음이 틀림없다. 장금은 시작도 끝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진 여의다.

기록만 놓고 보면, 대장금이 과연 국내는 물론 외국까지 한의학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의술을 보유한 이였는지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중종에게는 가장 신뢰하고 마지막까지 위로받고 싶었던 '최고의 의사'였다.

오늘날 어떤 의사가 환자로부터 이런 전폭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환자를 둔 대장금은 가장 유능한 의사는 아니었을망정, 가장 행복한 의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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