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이유와 거시경제적 이유가 다 있다. 지난 25일(현지시간) 끝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현 물가 수준이 한국은행의 매파적(금리 인상) 행보 속도를 늦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한은법 개정안도 중요한 변수로 꼽힌다.
▲이명박 대통령은 금리인상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진은 지난 25일 피츠버그에서 열린 한-캐나다 정상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한 이 대통령. ⓒ청와대 제공 |
대통령 발언의 무게
시장이 기준금리 인상 시기를 내년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이자 새로운 변수가 바로 최근 끝난 G20 정상회의다.
피츠버그에서 각국 정상이 합의한 선언문은 여전히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부양 기조를 이어간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선언문의 서문 8~10항은 모두 이와 같은 내용을 담았다. "(경제가) 정상화되고 있다는 생각으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 (…) 회복이 견고하고 확실해질 때까지 강력한 정책대응을 유지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출구전략에 관한 준비는 오는 11월 스코틀랜드에서 열릴 재무장관회의로 미뤄졌다.
특히 한국은 내년 G20 회담을 유치하는 나라다. 정상회담 차기 주최국이 다른 나라보다 먼저 금리를 인상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된다. 기준금리 인상 시기가 당초 예상보다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이유다.
정용택 KTB투자증권 거시경제팀장은 28일 "G20회의 차기 개최국으로서 '출구전략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공식화한 한국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먼저 기준금리를 올리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라며 "기준금리 인상 시기는 내년 1분기께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락 토러스투자증권 연구위원도 "의장국 입장에서 다른 나라보다 먼저 기준금리를 끌어올리는 것은 정부가 가장 원치 않는 시나리오"라며 "중국, 호주 등이 금리를 올리는 것을 확인한 후인 내년초가 돼야 (기준금리 인상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도 이와 같은 입장을 확실히 하며 한은을 압박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지난 20일, 출국 전 G20 회의 인포메이션센터 홈페이지에 올린 기고문에서 "현재로서는 실질적인 출구전략으로 나아가기에는 세계 경제에 상당한 하방위험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술 더 떠, 지난 25일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의 주요 분야가 여전히 연약한 상태를 지속하는 상황에서 금리에 손을 대는 것은 너무 이르다"며 금리인상 분위기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성태 한은 총재가 "금리가 일부 인상된다 하더라도 지금 금융완화상태가 상당히 강해 (기존의) 완화기조는 유지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지 불과 2주가 지났을 때다.
한은이 쉽사리 정부에 반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한은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한은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 한은은 어쩔 수 없이 정부에 고개를 조아려야 할 때다"라며 기준금리 인상에 나서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물가는 아직 '안녕하다'?
한은의 기준금리 조절 제1 지표인 물가가 아직 목표치 하단에 머물러 있다는 점도 기준금리의 조속한 인상을 가로막는 변수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2%(전월대비). 한은의 물가안정 목표치는 2.5~3.5%로 아직 한은 기준선에 닿지 않았다. 소비자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식품과 전세 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으나, 현 기준지표 수준으로는 한은이 "물가가 너무 높아 기준금리를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무리다.
정 팀장은 "현 비상경제체제의 경기정점은 내년 초가 될 것이며, 그 때가 돼야 물가가 3% 전후반 정도까지 오를 것"이라며 "지금으로서는 한은 내부적 기준으로도 기준금리를 끌어올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시장을 놀라게 한 이 총재의 매파적 발언이 있었음에도 한은 내부적으로도 기준금리 인상을 부담스러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보통 금리인상이 수개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뤄지곤 하기 때문이다. 한은의 선택이 단기 이벤트성이 아니라는 '의지'를 시장에 보여야 한다.
실제 지난 2005년 10월 기준금리를 약 1년 만에 처음으로 끌어올린(3.25%→3.50%) 후, 한은은 2개월-4개월-4개월-2개월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갔다. 당시는 주택경기가 사상 최고의 과열국면에 달했을 때다.
반면, 지금은 주택부문에서 거품 재발 신호가 나오고 있으나 여전히 '비상경제'라는 단서조항이 깔려 있다. 장기간에 걸친 금리 인상은 한은으로서도 큰 부담이다. 공 연구위원은 "한은의 '금리 정상화' 복귀는 현 기준금리 수준을 감안할 때 최소 두세차례에 걸쳐 이뤄질 것"이라며 "공격적인 긴축사이클에 들어가기가 한은으로서도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시장은 이미 상승 기정사실화
▲올해 들어 각종 금리지표는 반등 추세를 보이고 있다. ⓒ프레시안 |
한은에 따르면 지난달 신규취급 대출에 대한 예금은행 대출금리는 전월대비 0.08%포인트 올라 연 5.61%에 달했다. 저축성수신 평균금리는 전월대비 0.15%포인트 급등하며 지난 2월 이후 처음으로 3%대(3.07%)를 기록했다.
기업들은 한은이 기준금리를 끌어올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자금을 조달하려 회사채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9월 마지막주(27~30일) 회사채 발행계획물량은 총 13건에 1조728억 원에 달한다. 9월 한달 총발행액은 3조8294억 원으로 8월(1조8166억 원)의 두 배가 넘는다. 보다 싼 조달비용으로 기업운영자금을 조달하려는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시장의 빠른 대응이 이뤄짐에 따라 자금의 대이동이 조만간 가시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다. SK증권은 28일 보고서에서 "10월 금통위도 지난달처럼 매파적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며 "정기예금과 머니마켓펀드(MMF) 등에서 총 20~30조 원가량의 자금이 채권형 펀드와 중장기 예금으로 유입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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