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출간된 심훈의 유명한 소설 <상록수>. 소설에서 사람들은 일이 생기면 '선생님'인 채영신을 찾는다. 그 일 중에는 부상이나 작은 질병도 빠지지 않았다. 채영신은 붕대, 소독약, 옥도정기, 금계랍, 요도포름 등을 자비로 구입하여 사람들을 치료해준다. '재미'도 뒤따랐다. 약품 구입을 위해 빚을 낼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왜 내가 진작 의술을 배우지 않았던가하는 탄식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들에 대한 원망도 이어진다. "의사란 놈들이 있다 해도 그저 돈에만 눈들이 빨갛지." 농촌에 헌신한 채영신의 눈에 의사는 돈만 밝히는 이기주의자들이었다.
인술과 행림
▲ 심훈. ⓒ동은의학박물관 |
조선 시기 한국인들이 의료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 중 하나는 바로 인술이었다. 유학자들은 유교의 도덕을 실천하는 방편의 하나로 마을 사람들을 치료해주곤 했다. 물론 보수는 받지 않았다. 대가가 있다면 인술이 아니었다.
서양 의학과 인술
개항 이후 서양 의학이라는 새로운 물결이 들어왔지만 인술은 이어졌다. 제중원에서는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을 제외하고는 약값을 받지 않았다.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일제도 자혜의원을 통해 시혜적인 치료를 시행하였다. 설립 직후 자혜의원의 무료 진료 비율은 80%가 넘었다. 한국인들은 서양 의학도 인술의 대상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서양 의학을 배운 의사들 중에도 전통적 가치인 인술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볼 때 의료란 고매한 인격과 정신을 가지고 베풀어야 할 인술이지, 돈을 버는 것이 아니었다. 의사란 가장 양심적인 직업이어야 했다.
졸업을 앞둔 의학생들도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 일해 보겠다는 포부를 밝히곤 했다. 병마에 시달리는 동포의 따뜻한 벗이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인술은 소비자들만의 요구가 아니었다. 의사들에게도 의무처럼 다가온 사명이었다.
유석창
인술을 실천하는 의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유석창은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규모의 구료 사업을 기획하였다. 어려운 사람에게는 실비만 받고 아주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진료를 제공하는 병원의 설립이었다. 후원을 얻기 위해 사회의 유지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첫 반응은 차가웠다. 설립 비용도 문제지만 유지는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개업 의사들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동료 의사들의 참여도 이어졌다. 마침내 1931년 서울에 '중앙실비진료원'이 설립되었다. 개원도 하기 전에 소문을 들은 환자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이 병원은 해방 후 민중병원으로 이어졌다.
▲ 유석창과 민중병원. ⓒ동은의학박물관 |
이영춘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영춘은 당시 누구도 감히 나서지 않던 농민 치료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그는 윤일선 교수의 지도를 받아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교수의 지도 아래 배출된 최초의 의학 박사였다.
하지만 공의(公醫) 생활을 통해 질병으로 고통 받는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했던 그는 일본인 농장주의 요청으로 1935년 전라북도 개정에 내려갔다. 그리고 한국인 소작 농민을 위한 거의 휴일이 없는 진료가 이어졌다.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영춘이 서울로 가게 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농민들은 그가 떠난다면 자신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며 그를 붙잡았다. 해방 후 그가 설립한 개정병원은 상당히 오랜 동안 전라도 지역의 주요 병원으로 기능하였다.
▲ 이영춘 박사 취득 관련 신문 기사와 개정병원. ⓒ동은의학박물관 |
문턱이 높았던 병원
인술을 실천하던 의사들이 있었음에도 일반의 시각은 따뜻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병원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진료비가 "대다수 민중의 생활 정도에 비추어 엄청나게 고가인 것이 사실"이었다.
나아가 의사들이 부당한 진료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들은 "쓰지 않아도 될 약을 쓰고, 주지 않아도 될 주사를 주었다." 고의로 환자의 입원 기간을 연장시켜 "치료비를 빼앗았다." 소비자들은 의사가 의료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불신을 키운 약과 주사
특히 약과 주사가 불신을 키웠다. 신약의 경우 원가의 6~7배, 심하게는 10배를 받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약값이 비싸다 보니 약을 주지 않는 의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칭찬하는 일도 벌어졌다.
매독의 특효약으로 인기가 높던 살바르산 606주사는 원가의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매독이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병이라는 점에서 소비자는 부르는 가격을 그대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가격이 높고 인기가 좋다보니 의료인들 사이에 경쟁도 일어났다. 약사들이 주사약을 파는데서 나아가 환자에게 직접 주사를 하는 일까지 생겼다.
진료비가 비싼 이유
▲ 일제 강점기 병원 계산서. ⓒ동은의학박물관 |
의사가 되기 위해서도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의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몇 백 석 많으면 몇 천 석의 소출이 있어야 했다. 부모들은 입고 싶은 것 입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먹지 않으며 학비를 댔다. 본래 의사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직업이었다.
환자가 느끼는 무력감
그러나 빈곤자만이라도 무료로 치료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요구에 대해 한 의사는 "당연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동시에 세상이 인술을 핑계로 의술을 구속하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사들이 볼 때 상당한 재산이 있으면서도 진료비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급할 때는 왕진을 청하고는 치료가 끝나면 차일피일 진료비 지급을 미루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술을 악용하고 있었다. 의사들에게 그런 환자들이 "얼마나 미운지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에 병이 났을 때 의사의 치료를 받고 간호사의 간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부유층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당의 푸닥거리나 들으며 숨을 거두고 있었다. 돈 없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죽을 수밖에 없느냐는 한탄이 이어졌다. 진료비에 대해 느끼는 소비자들의 무력감은 의사들의 환자에 대한 불만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무료 진료의 감소
▲ 세브란스병원의 시료병실(1930년대). ⓒ동은의학박물관 |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병원도 마찬가지였다. 선교를 위해 설립된 병원인 만큼 자선 진료는 바람직했다. 하지만 병원의 운영을 고려한다면 지방의 선교사들이 보내는 환자를 모두 무료로 치료할 수는 없었다. 1920년대 후반 거의 절반에 육박했던 무료 환자 비율은 1930년대 후반 15%로, 1940년대에는 한 자리 숫자로 줄었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이제 의사나 환자나 모두 의료란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했다. 인술은 박물관에 전시될 유물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전통은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술에 대한 기대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한국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의료가 의사 개인의 선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으로 인식되기까지, 그리고 그런 제도가 갖추어지기까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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