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권자는 자식을 징계할 권리가 있다.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리고 친권자는 법원의 동의를 얻어 자식을 교정기관에 맡길 수 있다. 자식은 친권자가 정한 곳에서 살아야 한다."
'징계권', '거소지정권'…친권자에 치우친 민법 규정
현행 민법에 보장된 내용이다. '징계권', '거소지정권' 등으로 명문화된 이런 내용은 오랫동안 인권 활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아왔다. 자식을 키우는 사람, 즉 친권자의 권리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반면, 아이들의 권리는 제대로 보장돼 있지 않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실제로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은 아동을 보호의 객체가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도록 규정했다. 아동이 능동적인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지난 2003년 한국 정부에게 아동의 견해를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입법조치를 권고했다. 법무부가 민법 개정 작업을 시작했을 때, 인권 활동가들의 관심이 쏠린 게 당연하다.
하지만 법무부가 지난 7월 입법 예고한 민법 개정안은 이런 기대를 빗나갔다. 1958년 민법 제정 당시부터 변함없이 유지돼 온 친권자 중심 규정은 그대로 남았다.
인권위 "미성년자의 권리 주체성 존중해야"
국가인권위원회가 24일 법무부 장관에게 "아동 권리 보호"를 주문한 것은 그래서다. 인권위는 이날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의견표명"이라는 제목의 결정문을 발표했다. 인권위는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민법 개정안'이 친권제도 등의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어 아동 인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이날 "민법의 '징계권', '거소지정권' 관련 규정들은 지나치게 친권의 권리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며 "이들 규정은 친권자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고 미성년자의 권리주체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인권위가 이날 문제 삼은 것은 '징계권', '거소지정권' 관련 규정만이 아니다. 이번에 신설된 후견인 관련 규정에 대해서도 보완을 요구했다. 개정안 제909조의 2 제3항에 따르면, 단독 친권자 사망 시 생존부모를 친권자로 지정하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인정될 때 법원의 직권, 친족이나 검사의 청구에 의해 후견인을 선임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법원의 직권개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보완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현행 민법에 따르면, 협의 이혼 과정에서 자녀 양육에 관한 사항이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법원의 직권개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조항이 실제로 적용된 사례는 흔치 않다. 법원의 직권개입을 통해 후견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한 개정안이 별 실효성이 없으리라는 판단이 나온 배경이다.
"아동 의사 청취 연령, 현행 15세에서 12세로 낮춰야"
그리고 인권위는 아동의 의사표명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도록 요구했다. 민법 개정안 제909조의2 제6항 '후견인 임무 대행자 선임 규정'이나 제 924조 '친권상실 규정' 등에 자녀 의사를 고려하도록 한 규정이 없다는 것. 인권위는 아동의 의견을 존중하고 청취하는 규정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아동의 의사 청취 연령이 일률적으로 15세라고 규정된 점도 문제로 꼽혔다. 인권위는 "우리나라 아동의 신체적ㆍ정신적 발달 상태를 고려할 때 그 인정 연령이 매우 높고 아동이익 보호라는 입법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어 인권위는 "의견청취 최저연령을 하향하여 최소 중학교 취학연령인 12세 이상 아동의 경우는 의사를 직접 확인하도록 하고,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전문가 지원을 통해 아동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의사를 확인하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권위는 후견인 감독제도에 대해서도 개선을 요구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후견인 감독기능은 친족회에 있다. 하지만 이런 기능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부모의 이혼 등으로 방치된 아이를 후견인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도, 친척이 개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 제909조의2 제5항에 따르면, 법원이 4촌 이내의 친족이나 적합한 사람 가운데 후견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법원의 후견기능을 높여 아동 보호에 공백이 없도록 하거나 친족회를 자녀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제3의 후견 감독인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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