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우려의 목소리를 비교적 강하게 내고 있다. 대체로 신중함을 잃지 않는 증권가에서 이례적으로 "부정적"이라는 전망이 한 목소리로 나올 정도다. 산업계 관계자들은 아예 경쟁력을 잃어가는 산업을 인수하려는 이유 자체가 궁금하다고 되묻고 있다. 조석래 회장의 의중은 무엇일까.
효성 직원도 몰랐다
22일 하이닉스 주식관리협의회 주관기관인 외환은행이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한 곳이 하나 있다"고 발표했다. 시장이 곧바로 뒤집어졌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이번에도 역시…(없구나)"라는 게 시장의 예상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효성이었다. 당초 재계에서는 하이닉스의 원래 주인이었던 LG, 인수합병을 통한 사세불리기에 수뇌부에서 큰 관심을 가진 한화 정도를 유력한 후보로 봤었다.
▲조석래 회장의 승부수는 무엇일까. 지난 10일 오후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조 회장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
그러나 범위를 넓혀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전격적'이라는 게 시장의 반응이다. 그룹의 대외창구인 홍보실은 물론, 대부분 사내 직원들도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효성 간부급의 어디까지가 사전에 이 사실을 알았느냐가 관심사일 정도다. 그룹 관계자는 23일 "아무래도 컨피덴셜하게 진행되니까 대부분 몰랐던 것 같다. 사전에 어떤 통보도 받지 못했다"며 당혹감을 내보였다.
업계 일각에서는 후계자 구도에 대한 회장의 고민이 담겨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효성그룹 사정에 밝은 한 재계 관계자는 "아들들한테 회사를 나눠주기 위해서라도 덩치를 키우는 방법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하이닉스를 인수하면 큰 아들한테 하이닉스, 나머지 둘 한테 중공업과 섬유부문을 떼주면 된다. 삼성처럼 효성이 크지 않으니 덩치를 무리해서 키우려는 것 아니냐"고 보기도 했다.
고래 잡아먹는 새우?
시장이 당황하는 가장 큰 이유는 효성의 '덩치'다. 효성이 과연 하이닉스를 삼킬 정도의 회사냐는 것.
현재 효성그룹의 총자산은 8조4240억 원 가량으로 재계순위 33위다. 하이닉스의 총자산은 13조5393억 원(22위)이다. 효성보다 덩치가 1.5배 가량 크다. 만일 효성이 하이닉스 인수에 성공한다면 재계 판도가 뒤흔들리는 '대사건'이 되는 셈이다.
하이닉스를 인수하는데 필요한 자금 규모는 약 4조 원 정도로 추정된다. 매각대상 주식이 전체 지분의 28%에 달하는 1억6548만 주인데, 최근 주가(2만 원선 초반) 기준으로 3조 6000억 원이 넘는다. 여기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하면 4조 원은 돼야 인수가 가능할 것으로 시장은 내다보고 있다. 여전히 국내 경기전망이 불투명한 현실을 고려할 때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게다가 8조 원이 넘는 하이닉스의 부채는 인수와 동시에 효성이 통째로 떠안아야 한다. 효성 역시 올해 상반기 기준 2조1000억 원의 부채(순부채비율 77%)를 지고 있다. 인수와 동시에 회사 자금 사정이 급격히 나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 때문에 효성의 단독 인수는 '불가능한 시나리오'라는 의견이 강하다. 효성이 현재 가진 현금은 불과 1600억 원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경영환경에 은행 빚을 끌어들이는 것은 부담이 너무 크다.
골드만삭스는 이날 낸 보고서에서 "효성이 3조 원 이상의 인수자금을 들인다면 에비타(EBITDA, 이자비용과 세금, 감가상각비를 포함한 순이익) 대비 순부채가 9.2배, 부채비율은 228%로 높아진다"며 "설사 펀딩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자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길은 재무적 투자자(FI)를 끌어들이는 것인데, 이 역시 금호의 대우건설 인수사례처럼 만만치 않은 길이다. 하이닉스의 미래 전망도 낙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이닉스반도체 M11공장(충북 청주) . 낸드플래시 제품을 주력으로 생산한다. 효성이 하이닉스를 경영할 능력을 갖췄느냐를 시장은 묻고 있다. 두 회사 주가가 곤두박질한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뉴시스 |
하이닉스 미래, 낙관 어려워
하이닉스는 삼성전자에 이은 세계 2위 반도체 업체다. 엄밀히 말하면 '메모리 2위 업체'이다. 하이닉스의 주력은 디램(D-RAM)으로, 경기를 극심하게 탄다. 고부가가치 분야인 낸드플래시 경쟁력은 떨어진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비경험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침이 극심하다"며 "(효성이) 과연 진지하게 판단하고 인수전에 뛰어든 것인지도 의심스럽다"고 일침을 놓았다.
메모리 산업 자체의 전망도 좋지 않다. 이민희 동부증권 선임연구위원은 "이미 하이닉스의 주력 분야인 디램 부문은 저성장국면에 들어갔다. 독일 키몬다가 망한데서 보듯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분야"라며 "낸드플래시가 성장산업으로 뜨지만 하이닉스는 경쟁력이 낮다"고 했다.
업계의 한 전문가도 "메모리 산업은 기본적으로 대규모 자금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싸움 자체를 할 체력이 안 된다"고 말했다. 최근 PC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신호가 나오지만 여전히 메모리 가격은 낮다.
조 회장이 하이닉스의 다른 부문에서 성장 가능성을 찾은 것은 아닐까. 전문가들은 역시 고개를 젓는다.
하이닉스는 경기를 덜 타는 비메모리 산업 부문에도 발을 담그고는 있다. 시스템LSI(대규모집적회로) 부문 진출이 그것이다. 시스템LSI는 웨이퍼(기본 기판)에 메모리와 함께 관련 칩이 들어갈 전자제품에 알맞은 설계를 함께 하는 제품으로 국내에서는 삼성전자가 가장 앞서 있다. LCD TV에 쓰이는 LDI(LCD 구동회로), 휴대폰에 장착되는 CIS(카메라 모듈) 등이 주요 제품이다. 그나마 해외에 비하면 삼성전자의 기술력도 뒤쳐진다는 게 전문가의 평가다.
하이닉스는 파운더리(설계만 하는 산업)에도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동부하이텍과 매그나칩이 파운더리 회사다.
그러나 이 둘 모두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는 의견이 대세다. 시스템LSI의 경우 하이닉스가 기존 8인치 웨이퍼 라인을 놀리지 않기 위해 구동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메모리 생산라인이 이미 8인치에서 12인치로 넘어감에 따라 기존 유휴설비를 놀려두지 않기 위해 사업을 영위하는 수준에 그친다는 얘기다.
파운더리 역시 시장성을 거론할 단계는 아니다. 업계 전문가는 "파운더리는 UMC, PMC, SMIC 등 대만, 중국계 회사들이 장악한 분야다. (하이닉스의) 경쟁력을 논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둘다 죽을 수도"…효성·하이닉스 주가 급락
일단 효성이 하이닉스를 인수한다 쳐도, 성장시킬 능력이 부족하다고 시장은 냉정하게 지적했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하이닉스가 자금난을 겪으면서 투자가 많이 밀린 상태"라며 "신규라인 하나를 까는데만 3조 원이 들어가고, 매년 공정업그레이드를 위해 기본적으로 2조 원씩은 투자해야 한다. 효성이 그럴 능력이 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효성은 인수·관리 능력이 모두 부족하고, 하이닉스의 매물로서 매력도 떨어진다는 게 시장의 평가인 셈이다.
이 때문에 23일 개장과 동시에 효성 주가는 하한가로 밀려났다. 하이닉스 주가 역시 7%가 넘게 빠졌다. 시장이 냉정하게 조 회장의 승부수에 등을 돌린 셈이다. 심지어 재계 관계자는 "회장님께서 단독으로 결정하신 것 아닌가 싶다"라며 걱정스럽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효성의 하이닉스 인수는) 둘 모두에 굉장한 악재"라며 "효성은 아무런 시너지 효과를 못 누린다. 하이닉스는 효성보다 능력이 뛰어난 주인을 찾아야만 한다"고 단언했다.
업계의 실패 선례를 복습하라는 충고도 나왔다. 이미 지난해 금호가 과도한 차입금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반도체 부문에서는 동부그룹이 전혀 경험을 갖추지 못한 채 아남반도체 인수에 나섰다 곤욕을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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