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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환자의 배짱…"병 안 나으면 돈 못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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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환자의 배짱…"병 안 나으면 돈 못 줘!"

[의학사 산책] 서양 의학 도입 초기의 진료실 풍경

한옥을 개조한 초기의 병원

서양 의학 도입 초기에 문을 연 병원들은 대개 한옥을 개조한 건물을 사용하였다. 재동에 있었던 제중원의 경우 면적이 약 600평이었고 여러 채의 건물에 40명의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규모였는데, 건물들이 모여 있어 회진 등 병원 업무를 보는데 큰 불편을 없었다. 이후 전국에 세워진 선교 병원들도 대개 한옥을 개조해서 병원으로 이용하였다.

한옥의 방은 모두 온돌방이었고, 침대가 아닌 요를 깔았다. 한옥이라는 특성상 아궁이에 불을 때면 난방을 할 수 있었으므로 편리한 점도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1900년 구리개 제중원에 처음으로 침대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병원의 스프링 침대

아무도 스프링 침대를 떠나 마루로 내려가고 싶어 하지 않으며, 반면 침대가 없어 마루에 있던 사람들은 환자가 퇴원하는 대로 그 침대를 얻는 기회가 있기를 갈망한다. 분명히 간호하는 사람에게는 편안하며 청결을 유지하는데 매우 편리한 점도 침대를 선호하는 큰 이유이다.

▲ 대구 제중원(1899)과 경북자혜의원(1911). @동은의학박물관

양옥 다층 건물로 발전한 병원

일본 정부가 부산에 세웠던 제생의원은 낡고 비좁아 입원 환자를 위한 공간이 없어 2층의 병원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했는데, 아마도 일본식의 다다미방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병원은 1904년의 세브란스병원, 1907년의 대한의원의 준공으로 현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10년대에 지방의 선교병원들이 현대화되면서 신축 및 증축되었는데, 대부분 2층 벽돌 건물에 20~30개의 병상을 갖춘 입원실 여러 개와 남녀진료실, 남녀대기실, 지하실, 사무실, 조제실 등의 시설을 구비하고 있었다. 각 선교 병원은 그 지방의 언덕 위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쉽게 눈에 띄었다. 1904년부터 1909년까지 신축한 10개의 병원건물을 포함하여 1904년 이래 1918년까지 전국에 28개의 현대식 건물의 병원이 신축 및 증축되었다.

한편, 개업에 나선 한국인 의사들은 대개 단층의 한옥 건물을 병원으로 사용했지만, 1920년대에 들어 2~3층 건물이 병원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 원주 서미감병원(1913)과 나남 도립의원. @동은의학박물관

1904년 세브란스병원의 구조

당시 동양에서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던 세브란스병원을 통해 당시 대형 병원의 구조를 살펴보자. 세브란스병원은 2층과 지하층을 가진 건물로서 길이가 약 24미터, 폭이 약 12미터였으며, 실제적으로 3층 건물이었다.

지하층은 일반외래로 사용되었는데, 2개의 대기실, 진찰실, 검사실, 약국, 의약품 창고, 난방로, 석탄창고, 주방, 그리고 현대적인 건조실을 갖춘 세탁소 등으로 이루어졌다. 1층은 의사 사무실이 있었고 그 옆방에는 방사선 기계를 설치할 수 있고, 증기탕, 관절 치료를 위한 건조고온공기 장치, 이비인후과 질환 치료를 위한 압축공기 장치, 그리고 기타 다른 특수 장치가 있는 전기 설비가 잘된 방이 있었다.

이외에 아마포 벽장, 목욕실, 화장실 등이 딸린 3개의 남자 병실과 4개의 여자 병실, 그리고 일반 회의실 등이 있었다. 2층은 외과 수술을 위해 꾸며졌다. 수술실은 폭과 너비가 약 5미터였으며, 북동쪽은 거의 유리로 덮여 있어 자연 채광으로 방이 밝았고 집도 의사를 방해하는 그림자가 지지 않았다. 수술실은 흰색 에나멜을 입힌 철제 수술 기구 및 물약소독기가 갖추어져 있었다. 2층에는 7개의 병실, 간호사실, 외과처치실 등이 있었다.

▲ 1927년 광주의 중앙의원(원장 김흥열). @동은의학박물관
전체 건물은 온수로 난방을 유지했기 때문에 연기, 석탄가루, 혹은 재 등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건물 전체가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었다. 환기 역시 문 위의 채광창 및 배관을 통해 적절하게 유지하도록 했다. 검사실은 현미경, 원심분리기, 항온기 등의 최신 장비로 갖추어졌고 혈액, 소변, 대변 및 가래침 등을 검사할 수 있었다.

제중원에서의 진료

제중원에서는 번호표를 환자들에게 주어 순서대로 진료를 받게 했다. 패를 받고 제중원 안으로 들어온 환자는 서쪽 마당의 바로 오른편에 있는 환자 입구(즉 중문)를 통해 연못이 있는 마당을 거쳐 좁은 마루로 둘러싸인 외래 진찰실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문에는 다른 문지기가 있어 환자가 보여주는 패에 적혀 있는 갑‧을 등등의 순서를 보고 순서대로 들여보냈는데 무료로 진료를 받게 될 빈패(貧牌)를 소지한 사람은 진료비를 내고 원패(元牌)를 소진한 사람이 모두 진료를 받은 다음에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진찰이 끝난 환자는 진찰실 북서쪽을 통해 수술실 겸 약국으로 가서 처치를 받거나 약을 탄 후 남쪽에 있는 출구를 통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한국어 통역

한국인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외국인 선교 의사나 일본인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의사는 환자와의 대화를 위해 통역이 필요했는데, 제중원의 주사 중 한 명은 통역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주사는 양반이었고, 환자는 하류 계층이 많아 이에 따른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국에서 갓 일을 시작한 에비슨은 주사 한 사람을 통역으로 환자를 진료했다. 에비슨은 그 사람이 영어를 잘 했기에 환자들과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 환자들과의 대화가 쉽지 않았다. 양반 출신인 주사는 신분이 낮은 환자가 오면 통역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거만하게 호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한 번은 한 소년이 한글로 쓴 편지를 갖고 주사에게 왔다. 어려운 한자에 익숙해져 있는 주사는 한글로 쓴 편지가 자기를 무시하는 처사로 생각하고 심부름꾼 애를 발로 차서 돌려보내며 "주사는 상놈이 아니라고 네 상전에게 이야기하라"며 역정을 냈다.

또한 의사들이 진료실에서 접한 가장 큰 어려움은 병명(病名)이었다. 한의학에서 사용되던 용어나 한국인들이 스스로 말하는 병명, 즉 "폐병", "속병" 등은 서양 의사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통역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이 조선에서 활동하기란 쉽지 않았다. 알렌이 조선에 처음 왔을 때 영어 통역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알렌은 민영익을 치료할 때와 후에 병원을 개업했을 때 영어 통역을 할 줄 아는 조선인 중에서 한 사람을 고용했다. 그런데 그는 체온이 내려가는 것을 'increasing to less(아래로 올라간다)'라고 표현했다.

의료 기구

19세기 말 한국에서 어떤 의료 기구가 사용되었는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음의 각종 도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의사가 항상 가운 속에 넣고 다니는 기구로 반사 망치, 청진기, 검안경, 이경, 반사경, 비경, 압설자 등이 있었다. 그리고 진단 기구로 질경, 도자, 체온계 등이 있었고, 진단 장치로 현미경, 도말 표본 염색에 사용되는 기구 및 염색 시약 등이 사용되었다.

단순한 상처를 처치하기 위한 스펀지, 붕대, 고무 붕대, 린트 천과 약을 위한 약 스푼, 약연, 주사기 등이 있었다. 수술을 위해서는 메스, 가위, 수술 바늘과 명주실, 집게, 에테르 마취기, 사지 절단 기구 등이 있었다. 그리고 특수 치료를 위한 것으로 배농을 위한 흡인기, 카테터, 건전지를 이용한 전기치료기 등이 각종 문헌에 나타난다.

다만 현재 수술실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모자, 마스크와 고무장갑, 일회용 반창고 등은 1900년대 개발되었으므로, 대략 1910년대에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 알렌이 사용하던 진료기구(1880년대 후반)와 분쉬가 사용하던 수술 기구(1900년대 초). @동은의학박물관

진료비

한국인들은 병이 낫지 않으면 약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더구나 돈으로 지불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대신 몇 백 개의 달걀, 많은 고기, 돼지고기, 닭, 꿩, 기타 모든 음식물을 치료비로 받았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지불한 치료비는 의사에 대해 감사의 대가로 지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의사에게 혜택을 준 것으로 생각했다.

제중원이나 시병원에서 받는 1회분 약값은 평균 약 2센트였다. 환자들은 별 효과도 없어 보이는 한약(보약)을 15달러 혹은 20달러나 주고 조제해 먹으면서도 2센트 혹은 5센트 정도하는 치료비를 많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한국인 환자들은 이상하게 유리로 만든 약병을 한 번 가져가면 갖고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선교 의사들은 항상 신경 써야 했던 점이다. 그래서 병을 갖고 와야만 진찰을 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사진 촬영

진료했던 환자 중에서 흥미로운 예는 환자를 촬영하여 기록에 남겼는데 그중에는 여자 환자도 많았다. 현재 1800년대에 촬영한 환자 사진은 발견되지 않지만, 1900년대 초에 에비슨이나 분쉬가 촬영한 사진은 일부 남아 있다.

▲ 분쉬의 진료실 내부와 난소암에 의해 심한 복수가 동반된 환자 사진(1903). @동은의학박물관

오른쪽 사진은 지난 9월 10일 <조선일보> 인터넷판에 공개된 것과 같은 사진이다.

동은의학박물관도 분쉬의 손녀로부터 직접 기증 받은 같은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 측은 "이 사진이 1901~1905년 사이에 찍은 것"으로, "쌍태아 이상의 임신이거나 복수가 많이 찬 중증 임신 중독증 산모"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동은의학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진은 1903년에 촬영된 것으로, "난소암에 의해 다량의 복수를 가진 여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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